[한국사의 이해] 제 1장 선사시대의 전개와 고조선의 성립, 제 2장 삼국의 성립과 발전
1-1. 석기시대의 사회와 문화
1) 인류의 진화
2) 구석기 시대의 생활
3) 신석기 시대의 사회와 생활
- 주거생활의 모습: 땅을 파고 둘레에 기둥을 세워 만든 원형의 움집이며 화덕이 중앙에 위치합니다. 신석기 후기로 접어들면 농경생활이 본격화되면서 구릉지대로 이주하게 됩니다.
- 원시적인 수공업이 시작됩니다. 가락바퀴와 뼈바늘 등으로 실을 뽑아 옷과 그물 등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4) 신석기시대의 종교와 신앙
① 애니미즘: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생명과 영혼이 있다고 믿는 신앙으로 특히 농사에 영향을 끼치는 태양, 물에 대한 숭배가 중심이 됩니다.
② 토테미즘: 씨족, 부족의 기원을 특정 동식물과 연결시켜 이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③ 샤머니즘: 샤먼(무당, 주술사)이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 교류하면서 예언, 치료 등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이 당시 샤먼은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조가비(조개 껍데기) 가면이 샤먼이 주술을 행하면서 사용한 것이라 추정됩니다.
1-2. 청동기시대 등의 사회와 경제생활
1) 청동기의 전래와 보급
중국 랴오둥 지역은 약 3500년 전에, 한반도에는 약 3300년 전 무렵에 청동기가 전래되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우리 민족은 식수의 확보가 용이한 평야나 배산임수의 구릉지대에 정착하면서 농경생활을 하였습니다. 신석기와는 다르게 화덕이 벽면에 있는 장방형의 움집을 만들었고 기둥과 주춧돌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청동기 문화’라고 하지만 청동기는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제작에 상당한 귀한 제품이기 때문에 소수의 지배층에 의해 무기와 장신구 등으로 제한적으로 사용되며 여전히 (간)석기 사용이 일반적입니다.
석기의 발전과 농업 등 생산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증대하여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였고 그 결과 사유재산의 출현,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사회가 등장하였습니다.
반달 돌칼, 돌낫, 바퀴날 돌도끼, 홈자귀(돌도끼) 등의 정교한 간석기와, 미송리식 토기(청동기 및 고조선 문화의 대표적인 유물), 붉은 간토기가 발견되는 청동기입니다.
2) 군장의 등장
➤ 대규모 취락의 등장
(1) 울주 검단리와 부여 송국리, 진주 대평리 등에 방어시설을 갖춘 대규모 취락지가 등장
(2) 방호시설 : 환호(물웅덩이), 목책(나무 울타리) 등
➤ 도구의 발달, 농업 생산량 증가 – 경쟁과 갈등, 전쟁이 일상화됨
➤ 군장의 권위 상징 : 고인돌, 돌널무덤에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다양한 껴묻거리를 함께 묻음
고인돌 - 청동기 사회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분화된 계급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증표
3) 철기 시대 (교재엔 없음)
청동기와는 달리 철기는 재료인 철광석이 풍부하며, 청동기 제작 경험으로 기술도 축적되어 있어 철기 사용이 일반화됩니다. 또한 지상가옥이 등장합니다. 청동기는 점차 제사나 의식 등에만 사용하고, 철기 보급이 확산되어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농업 생산량이 급증합니다.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보여주는 철기 시대 유물들
① 세형 동검(청동기 시대는 비파형 동검), 잔 무늬 거울(청동기 시대는 거친 무늬 거울)
② 거푸집: 철기시대에는 거푸집을 만들어 청동기를 자체적으로 제작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철기 시대 유물들
① 명도전(춘추전국시대), 오수전(한나라), 반량전 등 중국화폐
② 경남 창원 다호리에서 붓 출토: 한자 사용의 증거
➤토기: 검은 간토기, 덧띠 무늬 토기
1-3.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1) 건국과 성장
청동기 시대에 예족과 맥족이 살던 요동과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기원전 10~7세기에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등장하였습니다. 초기 고조선의 세력범위는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의 분포로 보아 랴오둥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교재에는 없으나,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은 요령에 수도를 두었고 형제 상속이었습니다. 철기 시대의 고조선+위만조선은 평양 왕검성을 수도로 두고 부자상속을 이어나갔습니다.
단군신화의 내용 및 의미
① 환인 - 환웅 - 단군으로 이어지는 계보: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선민사상이 존재하였습니다.
②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한 사항들을 주관케 하였습니다.이처럼 지배계급은 농사, 형벌 등을 주관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였습니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청동기 시대에 청동기를 독점한 세력이 넓은 영역을 지배하면서 그 지배를 합리화하는 정치이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③ 고조선 시대의 사람들은 구릉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④ 단군왕검: 단군(제사장)과 왕검(정치적 군장)의 제정일치 사회였습니다.
① 환인 - 환웅 - 단군으로 이어지는 계보: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선민사상이 존재하였습니다.
②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한 사항들을 주관케 하였습니다.이처럼 지배계급은 농사, 형벌 등을 주관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였습니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청동기 시대에 청동기를 독점한 세력이 넓은 영역을 지배하면서 그 지배를 합리화하는 정치이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③ 고조선 시대의 사람들은 구릉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④ 단군왕검: 단군(제사장)과 왕검(정치적 군장)의 제정일치 사회였습니다.
[단군 고기가 수록된 역사서]
-고려 때의 삼국유사(일연, 1281): 조선 요임금 즉위 50년 되던 해(여고동시)에 건국되었다고 주장
-제왕운기(이승휴, 1287)
-조선 시대의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권람)
-조선 성종 시절 편찬된 동국통감(서거정): 요 임금의 즉위 50년을 단기로 삼았고 기원전 2333년 이라고 주장. 연구자에 따라 단군 고기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음.
-동국여지승람(노사신)
중국 문헌 가운데 조선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은 춘추전국시대에 씌여진 <관자>로서 기원전 7세기경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었고, ‘산해경’과 ‘전국책’ 등에 의하면 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연(燕)의 동쪽에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음.
-고려 때의 삼국유사(일연, 1281): 조선 요임금 즉위 50년 되던 해(여고동시)에 건국되었다고 주장
-제왕운기(이승휴, 1287)
-조선 시대의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권람)
-조선 성종 시절 편찬된 동국통감(서거정): 요 임금의 즉위 50년을 단기로 삼았고 기원전 2333년 이라고 주장. 연구자에 따라 단군 고기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음.
-동국여지승람(노사신)
중국 문헌 가운데 조선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은 춘추전국시대에 씌여진 <관자>로서 기원전 7세기경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었고, ‘산해경’과 ‘전국책’ 등에 의하면 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연(燕)의 동쪽에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음.
2) 위만의 집권과 멸망
(1) 위만 조선의 건국
① BC 2C 초 진한교체기에, 중국의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② 위만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철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습니다.
(2) 위만 조선의 발전
○ 건국 후 토착 세력을 우대: 토착 세력들의 지역 지배권을 인정하는 의미의 봉건제를 실시
○ 세형동검과 철제무기를 앞세운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사업 전개: 진번, 임둔 등을 정복하였습니다.
○ 중계무역으로 번성: 압록강, 동가강 유역의 소국들을 압박하고 남쪽의 진국(삼한)이 중국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으로 이득
(3) 위만 조선의 멸망
① 위만 조선이 주변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특히 흉노족과 연계하자 한 무제는 흉노 정벌에 앞서 위만 조선을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
② 한 문제는 기원전 109년 위만 조선을 공격하였고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은 멸망합니다. 전한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 4군(낙랑, 진번, 임둔, 현도)을 설치하였습니다. 그중 낙랑군은 400여년 간 존속하면서 우리나라의 통합을 방해하기도,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3) 통치체제와 8조법금
① 기원전 4~3세기 경 고조선의 왕권은 안정되어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으며 왕 밑에 박사, 대부, 상, 대신이란 관직이 있었고 무신으로는 장군, 비장을 두었습니다.
② 고조선의 8조법 중 3개의 조문과 1개의 풍습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살인은 사형으로 벌하는 것으로부터 생명존중을, 죄 지은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것으로부터 사유재산제도를, 상해는 곡물로 배상한다는 점에서 노동력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여인은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풍습으로부터 가부장적인 사회였음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③ 고조선은 부여와 마찬가지로 지배자가 죽었을 때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1-4. 여러 나라의 등장
1) 부여의 건국과 발전
철기 보급 이후 기원전 2세기 초반 중국 지린성 쑹화강 유역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초기 왕권은 미약하였으나, 기원후 1세기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성장합니다.
3세기 말 주변 민족의 침략으로 북부여와 동부여로 분열되었다가, 동부여는 광개토대왕 때에- 북부여는 494년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병합됩니다.
2) 부여의 사회 풍습
(1) 부여의 정치 : 연맹왕국(부족 연맹체)
중앙에 왕을 두었으나, 왕은 제사장의 성격이 강하였으며 왕권은 전반적으로 미약하고 대가들로 구성된 족장회의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습니다. 흉년시 책임을 물어 왕을 죽이거나 교체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사출도의 대가들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는데, 마가·우가·구가·저가의 이름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농업과 목축이 주요 산업이었습니다.
(2) 부여의 풍속
① 순장: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넣어 장사 지낸다.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명을 헤아린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② 형사취수: 친족 공동체적인 전통으로서 형의 자녀(노동력)와 재산이 다른 집안으로 귀속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 (형사취수 역시 부여 만이 아니라 고대 국가의 일반적인 풍속)
③ 영고(12월) : 초기에는 부족들 간 공동 수렵의 전통을 계승한 축제 → 농경이 일반화 된 이후에는 추수감사제의 성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④우제점복: 소를 죽여 그 굽의 형태를 보고 길흉을 점침
(3) 부여의 법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전해지며 고조선의 8조법과 유사합니다.
①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예로 삼는다
②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변상하게 하거나 노예로 삼는다 는 1책 12법
③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하며 부인이 질투하면 사형에 처하고 그 시체는 산에 버린다. 처가에서 그 시신을 가져 가려면 소나 말을 바쳐야 한다(지참금의 반환)는 조항으로부터 부계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동해안의 옥저와 동예
중국의 지린성 지역에서 부여와 고구려가 성장할 무렵, 함경도의 동해안 지역에는 옥저가,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지역에는 동예가 자리잡았습니다. 이들은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이 백성을 다스렸고 뒷날 고구려에 흡수되었습니다.
(1) 옥저
○ 경제: 어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며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이 발달하였으나 고구려에 복속되어 공물로 바쳤습니다.
○ 풍속: 민며느리제, 골장제
민며느리제 - 여자가 10여 세가 되면 신랑 집에서 맞아들여 양육하고 성인이 된 후 여자 집으로 돌려 보냈다가 전폐(결혼 지참금)를 지불하고 맞아들임
골장제 -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이 모두 썩게 기다렸다가 나중에 뼈만 추려서 관속에 안치하는 매장제도
(2) 동예
○ 경제: 역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였습니다. 단궁(박달나무로 만든 强弓), 과하마(조랑말로서 키가 작아 과일나무 밑을 지날 수 있다 하여 果下馬라 부름), 반어피(바다표범 가죽)와 같은 특산물이 유명하였습니다.
○ 풍속: 책화, 무천, 족외혼
책화 - 씨족간 경계 침범 시 배상
무천 - 10월에 행하여지는 제천행사
4) 삼한의 성립과 사회 모습
기원전 3~2세기 경 한반도 중·남부에는 여러 소국이 완만하게 연맹한 진국이 존재하였습니다. 이후 진국사회는 고조선 - 위만조선 - 한4군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북쪽에서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졌습니다.
(1) 삼한의 정치
삼한 중 마한의 세력이 가장 강하였고 마한의 목지국이 삼한을 대표하여 중국과 교류하였습니다. 삼한 소국과 읍락은 신지, 견지, 읍차, 부례 라고 불린 지배자들이 각기 다스렸습니다. 또한 제정분리 사회였는데요,
천군은 제사장으로서 신성지역인 소도에서 농경과 종교에 관한 의례를 주관하였는데, 소도에는 솟대를 세워 신성지역임을 표시하였고 죄인이라도 이곳으로 도망가면 잡아가지 못하는, 정치적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도는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냐고 하면 정 반대인 것이, 제정일치사회에서는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왕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사에 대한 책임을 별도로 제사장에게 맡김으로 오히려 왕권이 강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2) 삼한의 경제와 사회
삼한은 철기문화의 유입으로 대체로는 나무나 돌로 된 농기구를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벼농사가 널리 행해지고 저수지를 축조하였습니다. (김제의 벽골제, 상주의 공검지, 제천의 의림지 등)
○ 삼한의 풍속: 5월이면 씨를 뿌리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수릿날(단오)이 있었고 10월에는 계절제를 지냈습니다. 공동체의 전통을 보여주는 두레를 조직하여 공동 노동을 하였습니다.
2-1. 삼국의 성립과 대외팽창
우선 중간의 고구려는 아직 기술하지 않았지만 특징을 비교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고대국가의 성장에 대해 살펴보는데요, 고대국가는 군장국가·연맹왕국이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형성한 국가를 말합니다. 건국 순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였음에도 고대국가로의 발전은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리적 조건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발전했습니다.
이제부터 고대국가의 성장에 대해 살펴보는데요, 고대국가는 군장국가·연맹왕국이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형성한 국가를 말합니다. 건국 순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였음에도 고대국가로의 발전은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리적 조건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발전했습니다.
1) 고구려의 성립과 성장
기원전 4~3세기 중국 랴오닝성 환련의 훈강 등에서 나라는 작은 정치 집단들이 나타났고 기원전 75년경 소노(비류나)집단을 중심으로 고구려라고 불리는 연맹체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부여에서 이주한 계루부 출신의 주몽이 기원전 37년 무렵 소노부를 밀어내고 고구려 왕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초기 도읍지는 졸본이었으나 2대 국왕인 유리명왕이 더 넓은 평야를 찾아 압록강 중류에 위치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이 때 환도성으로 옮겼다가 국내성으로 다시 옮기기도 하는데 평시 수도-전시 수도의 개념으로 거의 일체화되었기 때문에 교과서에는 잘 다루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후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합니다.
(1) 6대 국왕 태조왕(47년~165년) : 고대국가체제 정비
- 왕위 세습이 시작(계루부에 의한 왕위 계승, 허나 형제 상속의 단계).
- 5부제 확립
- 대외 정복 : 옥저를 정복하고, 한 4군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국력이 신장되었습니다.
(2) 9대 국왕 고국천왕(179년~197년) 교과서엔 없음
- 왕위의 부자 상속을 확립, 귀족 계층을 누르고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을 추진
(교과서에는 부자상속을 확립한 것이 고국천왕의 다음 왕인 산상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국천왕은 후사를 보지 못하고 승하하여 동생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것이 산상왕입니다.)
- 귀족들의 세력 기반인 5부제를 행정구역으로 개편
- 을파소를 재상에 등용하고 진대법을 실시(춘대추납과 환곡(의창)제도) 합니다.
(3) 동천왕,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 3세기의 동천왕: 당시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으로 분립하고 있었는데 국경을 접하고 있던 위의 침입으로 한때 쇠퇴
- 4세기의 미천왕: 313년 낙랑군을, 이듬해에 대방 정복으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중국 세력 축출
- 4세기의 고국원왕: 요동을 놓고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위진 남북조 시기 북조의 왕조)과 대립하여 342년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고구려 침공으로 고국원왕 원통하게 전사
○ 소수림왕: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국력 회복에 힘을 쏟음.
불교수용(사상적 통일 추구), 유교 교육 기관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2) 백제와 신라, 가야의 성립과 성장
(1) 백제
기원전 18년 온조로 대표되는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 세력이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을 복속시키면서 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온조설화)
★3세기 중엽의 고이왕: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이후 목지국을 병합하면서 마한의 맹주국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때 귀족회의의 장인 좌평(신라의 상대등에 해당)을 설치하고 이를 왕권에 예속시킴으로써 왕은 더 이상 귀족들의 대표가 아니라 귀족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라는 의미라는 것을 확실히 합니다. 관등제(6좌평, 16관등), 관복제를 실시하였습니다.
(2) 신라
고조선 유민들은 경주로 이주하여 기원 전후 사로국(신라)을 건국하였습니다. 신라의 지배자 칭호는 1대 박혁거세 시절의 거서간(부족장이란 의미), 2대 남해 시절의 차차웅(제사장) //제정일치 단계였음// 을 거쳐 3대~16대까지 이사금(연장자란 의미) 이란 호칭을 썼는데 17대 내물 부터 마립간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왕이란 호칭은 22대 지증왕때부터 쓰이기 시작합니다.
★4세기 후반의 내물 마립간(교과서엔 나물왕 이라고 적혀 있음) :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였고 마립간으로 왕호를 바꾸며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를 통해 전진과 수교하며 선진문물을 도입하였고, 고구려 군대의 힘을 빌어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강화를 추진하였습니다. (호우명 그릇-고구려가 신라에 군대를 파견하고 보호국으로 삼은 증거)
(3) 가야
변한의 여러 소국들이 ‘가야’라는 이름을 공유하면서 정치적, 문화적 연대를 형성하였습니다. 설화에 의하면 가야는 1C 경 알에서 태어난 수로를 왕으로 추대하여 건국되는데 이 설화와 유사한 내용들이 가야의 다른 소국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가야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철기문화가 발달했으나 통일왕국의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 3세기 금관가야 주도기
낙동강 하류(김해)에 위치하여 낙랑, 대방-가야-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사로국과 경쟁관계였습니다. 백제, 일본과 연계하여 신라를 압박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고 이후 광개토대왕의 정벌로 금관가야는 몰락하게 됩니다.
➤ 5세기 이후 대가야 주도기
낙동강 상류(고령)에 위치한 대가야가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나제동맹이 형성되면서 가야도 이 동맹에 합류합니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가 가야를 서로의 세력 하에 두고자 하면서 가야 연맹이 분열됩니다. 법흥왕 때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진흥왕 때 대가야가 병합되면서 가야 연맹체는 멸망합니다.
3) 4~5세기 초반의 삼국관계
3세기의 삼국은 국가 성립의 단계로서 아직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313년~314년 사이에 그 동안 고구려와 백제 양쪽에서 압박을 받아 오던 한 4군의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되면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완충 지대가 없어져 양국은 과거 한 4군의 땅을 놓고 대결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이후 신라의 성장으로 삼국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형세를 띄게 됩니다.
고구려의 미천왕(재위 300~331년)은 앞서 말했듯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고 요동 진출을 꾀했다가 전연에 저지당하였습니다.
백제의 근초고왕(재위 346~375년)은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을 확립시켰고, 마한을 장악하고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해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치양성 공격을 물리치고 (369년) 평양성을 공격하여 승리(371년)하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원통하게 전사합니다. 근초고왕은 요서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설치하였으며 일본(규슈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렇게 요서-백제-일본을 잇는 고대 상업망을 구축해 동북 아시아의 국제교역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일본에 왕인과 아직기를 파견하고 칠지도를 하사합니다.
고구려는 평양성 전투 이후 소수림왕(재위 371~384년)이 즉위하는데요, 대외팽창을 자제하고 태학을 설립하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체제 정비에 힘을 쏟았습니다. 한편, 백제의 침류왕(재위 384~385년) 역시 불교를 공인합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재위 391~412년) 때 대외정복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백제가 일본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하자 신라의 요청으로 왜군을 격퇴하고 금관가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고 거란, 숙신, 동부여를 정복하였습니다.
4) 5~6세기 전반의 국제 정세와 삼국
이 시기 중국은 위진 남북조의 혼란기로서 중국과의 대결 국면이 완화되면서 고구려의 장수왕(재위 413~491년)은 남진정책을 실시하였는데, 북위의 침략에 대비하여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습니다(427년).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백제 비류왕과 신라의 눌지 마립간(재위 417~458)은 433년 우호관계를 맺으며 나제동맹 결성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때 눌지 마립간은 삼국 중 부자상속을 확립하였고 씨족적인 6촌을 행정적인 6부 체제로 전환(다다음 지도자인 소지 마립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합니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항복하였음에도 고구려를 자극하자, 고구려는 백제의 개로왕을 살해(475년)하였고 이후 즉위한 백제의 문주왕은 개로왕의 패사로부터 한 달만에 웅진(충남 공주)로 천도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장수왕은 이후 이렇게 한강 유역(한성)을 장악하고 494년 부여를 완전히 병합하면서 죽령에서 남양만에 이르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충주의 중원 고구려비 건립) 한반도 대부분과 만주 일대의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장수왕은 이름대로 장수하는 바람에 5세기 거의 내내 살아계셨음..
493년 백제의 동성왕이 신라와의 혼인정책으로 나제동맹을 강화합니다. 가야도 나제동맹에 합류하였는데, 이 나제동맹으로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북위와 교류하자 고구려는 이에 대응하여 남중국(동진, 송, 남제 등)과 교류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6세기 초반 백제의 무령왕(재위 501~523년)은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는데, 전역에 22담로(성읍)라는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통치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한강 유역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을 적극 개발합니다.
같은 6세기 초반 신라에는 지증 마립간·지증왕(재위 500~514년)이 즉위합니다. 마립간의 칭호를 왕으로 바꿉니다. 전쟁은 멈추고 다른 나라보다 뒤쳐진 신라의 내정 개혁에 집중하였습니다. 순장을 폐지하였고, 우경법이 실시되었으며 공식국호를 신라로 바꿉니다(503년). 군현제를 정비하였고 수도 동쪽에 상설 재래시장인 동시와 이를 관리할 관청 동시전을 지었습니다. 이사부에게 우산국 정복을 명하여(512년) 현대의 우리에게도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5) 6세기 중반 이후의 정세 변동
지증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법흥왕(재위 514~540년) 역시 강도 높은 내정 개혁 등을 통해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법흥왕은 우선 율령을 반포(520년)하였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고 골품제를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왕이 군사권을 장악한다는 의미의 병부를 설치하였고 왕을 대신하여 귀족회의를 주재하는 상대등을 설치(531년)하였습니다. 이차돈의 도움으로 불교를 공인(527년)하고 금관가야도 정복(532년)합니다. 이후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536년)하여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주의식을 표현하였습니다.
백제의 성왕(재위 523~554년)은 백제를 중흥하고자 538년 웅진에서 사비(충남 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로 고쳤습니다. 행정조직을 중앙에 22부의 실무 관청을 두고, 수도를 5부로 나누며 다시 부 밑에 5항을 두는 방식으로 정비하였고 무령왕의 22담로를 - 전국을 동·서·남·북·중방 즉 5방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형식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사실 이때의 고구려는 왕위 계승 분쟁 발생함(544년)하여 정세가 어지러웠고 신라의 진흥왕(재위 540~576년)과 백제의 성왕의 연합 공격(551년)에 의해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맙니다. 이 한강 유역은 신라가 상류지역을, 백제는 하류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진흥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553년 백제가 점거하고 있던 한강 유역까지 점령하면서 나제동맹이 결렬됩니다. (여담이지만 553년은 진흥왕이 황룡사 건설을 지시한 해이기도..) 분했던 백제의 성왕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554년 가야군, 왜군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그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부근)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성왕은 목숨을 잃으며 백제 중흥의 꿈이 무너집니다.
이후 진흥왕은 대가야 역시 정복(562)하였고, 새로 확보한 영토를 직접 순시하며 새로 신라로 편입된 지방민들에게 불교 등을 전파하고 신라의 뜻을 전하는 내용을 돌에 새겼는데 그것이 진흥왕순수비로 현재 북한산비(555년), 창녕비(561년), 황초령비(568년), 마운령비 등 4개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고구려는 590년대에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평강공주의 부마 온달장군이 출전하였는데, 아차산성에서 신라군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두 나라의 동맹만 깨졌을 뿐이었습니다.
2-2. 삼국의 통치체제와 사회제도
1) 삼국 초기의 사회와 통치제도
고구려와 백제(5부), 신라(6부) 연맹체 : 고구려(제가회의), 백제(정사암회의), 신라(화백회의)
2) 중앙집권 통치조직의 정비
(1) 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조직 마련
고구려(4세기 소수림왕의 10여관등), 백제(고이왕의 16관등체계), 신라(6세기 전반 법흥왕의 17관등체계)
(2) 통치 체계
(1) 고구려 : 대대로(5세기 장수왕 대에 생긴 관직) 등 다섯 관등에 임명된 관리들이 협의체. 임기 3년의 대대로가 국정을 총괄함
(2) 백제 : 3세기 고이왕 때 6좌평제와 22부를 두어 중앙 행정업무를 분담시켰음
(3) 신라 : 6세기 법흥왕 때 상대등(국사 총괄), 병부 설치(군사업무), 7세기 중반 진덕여왕 때에 집사부, 창부를 비롯하여 다양한 행정관서를 정비함
3) 사회제도와 법률
(1) 사회제도
(1) 고구려 : 형수취수제도(초기 고구려), 서옥제(사위가 처가에 가서 일정 기간 동안 거주하는 제도)
(2) 신라의 골품제도 : 성골과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이 있었음
(3) 신라의 화랑제도 :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조직으로 새로 개편하고, 관리 등용, 전투에 동원
(2) 법률제도
고구려 소수림왕(373), 신라 법흥왕(520), 백제는 5세기 후반
이하의 내용을 잠깐 표로 정리해볼게요.
구분 | 고구려 | 백제 | 신라 | |
---|---|---|---|---|
중앙 | 귀족회의 | 제가회의 | 정사암회의 | 화백회의(만장일치) |
수상 | 대대로(막리지) | 6좌평 22부→상좌평 | 상대등 *법흥왕 | |
관등 | 10여 관등*소수림왕 | 16관등 *고이왕 | 17관등 *법흥왕 | |
지방 | 수도 | 5부 *고국천왕 | 5부 | 6부 *소지왕 |
지방 | 5부(욕살) | 5방(방령) | 5주 | |
하부단위 | 성 | 군 | 군·현 | |
촌 | 촌 | 촌(자치세력-토착) | ||
특수행정구역 | 3경 | 22담로 *무령왕 | 2소경 (동원경, 중원경) 사신 지방관이 파견 |
|
기타 | 사회제도 | 형수취수(초기), 서옥제 | 골품제도, 화랑제도 | |
법률제도 | 소수림왕(373년) | 고이왕 | 법흥왕(520년) | |
불교 공인 | 소수림왕 | 침류왕(386년) | 법흥왕(527년) | |
중앙집권국가의 기반 | 태조왕: 왕위세습 | 고이왕: 통치체제 정비 | 내물왕: 왕위 세습 | |
중앙집권국가 확립 | 소수림왕: 율령, 불교, 태학 | 근초고왕: 마한정복, 요서진출 | 법흥왕: 율령, 불교 | |
전성기 | 장수왕 | 근초고왕 | 진흥왕 |
4) 귀족과 농민생활
○ 귀족들의 삶 : 신라는 귀족에게 녹읍(녹봉 대신 군현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을 지급하였고, 왕족 또는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귀족에게는 별도로 식읍이나 전장(귀족이나 사원이 소유한 대규모 토지), 노비를 지급하였습니다.
○ 일반 평민들의 삶 : 조세와 역역, 군역의 부담
○ 노비들의 삶 : 개인이나 국가에 예속되어 고된 일에 종사하였음
○ 구휼제도 : 고구려의 진대법, 철제 농기구 보급, 우경 장려, 황무지 개간, 수리시설(저수지) 건설
2-3. 삼국의 문화와 종교
1) 삼국 예술의 보고, 고분과 고분벽화
1) 삼국의 고분 : 껴묻거리와 순장
2) 고분벽화 : 불교나 도교가 수용되어 연꽃 모양과 예불도, 청룡과 백호, 주작과 현무 등 사신도 중심
고구려 | 백제 | 신라 |
---|---|---|
돌무지무덤 장군총, 천추총, 태왕릉 |
돌무지무덤 | 4세기 중반 이전 널무덤 덧널무덤 |
굴식돌방무덤 널방의 천장에 벽화(불교, 도교 연꽃모양, 예불도, 사신 그림) 안악 3호분, 덕홍리고분 |
웅진천도후 벽돌무덤(남조 양나라 영향) 및 굴식돌방무덤 유행 무령왕릉이 벽돌무덤 |
4세기 후반 이후 돌무지 덧널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 *경주 이외의 신라, 가야 지역에는 산기슭에 넓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돌덧널을 설치한 구덩식돌덧널무덤을 주로 만듦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 |
사비 천도 이후 굴식돌방무덤 공주 송산리고분, 부여 능산리고분 |
6세기 이전 신라, 가야 껴묻거리 많고 순장을 행함 6세기 이후에는 신라, 가야에서도 굴식 돌방무덤 채용. 순장 금지, 껴묻거리 적게 넣음. |
2) 불교와 도교의 수용
1) 샤머니즘 : 제천행사
2) 불교의 수용 : 고구려 소수림왕(372년), 백제 침류왕(384년), 신라는 법흥왕(527년) 때 이차돈의 순교
3) 도교 : 고분벽화에 잘 나타남. 불로장생의 신선사상, 백제의 금동대향로
3) 유교 정치이념의 수용과 역사서 편찬
1) 유학의 수용 : 고구려(소수림왕, 태학 설립-372년), 백제(5경박사), 신라(진흥왕순수비, 임신서기석 등)
2) 역사서 편찬 : 고구려(소수림왕 유기 편찬 - 이를 간추려 이문진이 신집 5권(600년) 편찬), 백제(근초고왕 서기 편찬), 신라(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
2-4. 6~7세기 삼국관계와 대외항쟁
1) 삼국 간의 치열한 항쟁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상황은 장수왕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면서 왕권이 약화되었고 귀족회의에서 선출된 대대로가 실권을 장악하는 귀족연립정권이 등장하여 굉장히 불안정하였습니다.
관산성 전투에서 패전한 후 고전하고 있던 백제는 7세기 무왕(재위 600~641년)이 즉위하면서 많이 달라집니다. 왕권강화를 위해 신라에 맹공을 퍼부었고,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까지 고구려 공격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627년 신라 침공도 시도하였는데 당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하여 이를 중지하였습니다. 무왕은 백제의 중흥을 위해 애썼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계속하여 중국의 수와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견제합니다. 한편 640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여제동맹)하였다고 신라가 당나라에 주장하며 연합을 요청합니다. (여제동맹설의 근거는 신라의 대당 외교 문서인 바, 신라의 국제적 음모에 따른 허구적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니다.
2) 고구려와 수의 전쟁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양쪽의 협공으로 시달렸으며 이를 모면하기 위해 수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고 이를 계기로 수 양제의 고구려 침입이 이루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도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 개로왕이 전사한 이래 계속 적대적인 관계였고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틈을 타 고구려가 과거 백제의 영토였던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여 적대관계는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백제는 수나라 편을 들었습니다.
수 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한 대규모 침략(612년)을 하였으나 을지문덕(살수대첩)에게 크게 패합니다.
① 1차 침입: 수가 중국을 통일한 후 돌궐까지 복속시키자 고구려는 위협을 느껴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 수 문제는 이를 빌미로 고구려를 침입(1차 침입)했으나 실패
② 2차 침입
⒜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시달리던 신라 진평왕이 원광법사로 하여금 수나라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걸사표를 작성하게 하여 바치자 수 양제는 이를 빌미로 고구려를 재차 공격합니다.
⒝ 수 양제의 대군은 요동성에 막혀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하고자 보낸 30만의 별동대가 을지문덕에게 패하면서(612년 살수대첩) 2차 침입도 실패합니다.
⒞ 이후 수 왕조는 무너지고 당 왕조가 등장합니다.
3) 고구려와 당의 전쟁
641년 백제의 무왕이 사망하고 의자왕이 즉위하였습니다. 즉위한지 1년 후, 백제와 신라가 맞붙은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가 승리를 하자, 신라 조정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해 10월 마침 고구려에서는 일대 파란이 일어납니다.
고구려에서는 당과의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한 끝에 강경파인 연개소문은 영류왕 등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후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642년)하고, 서북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 쌓는 작업을 독려합니다. 나아가, 당과 긴장 관계로 접어들면서 남쪽 국경지대의 대립을 피하고자 백제와 화친(643년)합니다.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백제는 신라를 거세게 압박하였으며 같은 해 궁지에 몰린 신라의 선덕여왕은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데 당이 이 때는 거절합니다.
이후 645년 당태종이 직접 이끄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는데, 수나라가 함락시키지 못했던 요동성 등을 함락시키고 진격했으나, 안시성을 뚫지 못하고 철군하였습니다. 이때 당태종은 신라도 고구려 침공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고, 신라는 아무런 동맹관계가 없는 만큼 파병을 결정합니다. 신라가 북진함에 따라 백제 방면의 수비가 약해졌는데 이를 노리고 백제군이 신라의 7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신라는 북진을 멈추고 백제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주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당나라와 확실한 연합 작전을 벌인 데에 반해, 백제는 당나라와 교전하진 않았지만 신라의 당에 대한 협조를 저지시킨 바 당나라와 척을 지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한편, 선덕여왕의 신라 내부에서는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난을 일으켜 잠시나마 혼란스러웠고 선덕여왕은 10일 간의 난이 진행되는 동안 병으로 사망하여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이후 진덕여왕 때 김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 군사원조를 약속 받으면서 나당 연합이 성립(648년)합니다. 이로써 고구려, 백제, 일본의 종적인 연결과 신라, 당의 횡적인 연결의 대립 구도가 형성됩니다.
당은 전면전 대신 지구전으로 선회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어 먼저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 시킨 후 남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이것은 3장에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여담이지만 블로거의 수입 구조는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조회수랑 비례하진 않고 구독자가 광고를 누르면 수입으로 잡히는 듯 해요. 그래봤자 1년동안 1만 5천원 벌었음..><//
1 댓글
물론 역사 전공자는 아니니.. 잘못된 부분이 있음 얼마든지 댓글을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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