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이해] 제 3장 통일신라와 발해 + 제 4장 고려의 성립과 발전
3-1. 신라의 삼국통일
1) 나당동맹의 체결
지난 2장에서도 설명했던 것처럼, 백제의 의자왕(재위 641~660년)은 신라를 자주 공격하였고 대야성을 함락시켰습니다(642년).
//대야성 함락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권신이었던 연개소문이 27대 영류태왕(재위 618~642년)과 대신 100여 명을 시해하고, 영류왕의 조카를 28대 보장왕(재위 642~668년)으로 옹립한 것입니다. 고구려도 망조가 들기 시작합니다.//
위기를 맞은 신라는 김춘추를 당에 보내었는데, 마침 고구려 정복에 실패해 다시 공격할 기회를 엿보던 당은 신라의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648년). 이를 나당동맹이라고 부르며, 신라는 이를 위해 독자적인 연호를 포기하고 관복 역시 당나라의 것으로 받아들여 예를 갖춥니다.
② 사실 백제의 멸망은 국력이 약해서라기 보다는 지배층의 분열 때문으로, 의자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층은 나·당 연합군의 진격에도 방관적인 태도(계백이 모은 군사의 수가 5천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반증)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당군은 금강 하구인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크게 물리쳤으며, 김유신이 이끄는 5만여 명의 신라군은 황산벌(충남 논산)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여 명의 결사대를 물리쳤으며 이어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의자왕은 웅진성(충남 공주)으로 달아났다가 항복하였습니다(660년).
2)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1) 백제의 멸망(660년)
① 의자왕은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귀족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였습니다. 지배질서가 무너진데다 신라와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여 결국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② 사실 백제의 멸망은 국력이 약해서라기 보다는 지배층의 분열 때문으로, 의자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층은 나·당 연합군의 진격에도 방관적인 태도(계백이 모은 군사의 수가 5천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반증)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당군은 금강 하구인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크게 물리쳤으며, 김유신이 이끄는 5만여 명의 신라군은 황산벌(충남 논산)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여 명의 결사대를 물리쳤으며 이어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의자왕은 웅진성(충남 공주)으로 달아났다가 항복하였습니다(660년).
(2) 백제의 부흥운동
백제의 멸망은 지배층의 분열 때문이며 국력은 여전히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임존성(충남 예산)에서 흑치상지, 주류성에서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이 왕자 풍을 옹립하여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고 고구려, 일본과 연계하여 한때나마 나당연합군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으나 내부분열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와 당은 백제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서 대립하던 상황이라 백제 부흥군에 대해 경쟁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와중에 신라는 포섭책도 병행하였습니다.) 당도 의자왕의 아들인 왕자 부여융을 옹진 도독으로 임명하면서 신라를 견제하고 백제인들을 회유하였는데, 이러한 부흥운동은 백강(금강)에서 백제 부흥군과 일본의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종식됩니다.
(3) 고구려의 멸망(668년)
고구려가 수,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원정에 따른 긴 보급로를 공략하여 병참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백제 멸망 후 한반도 남쪽에서 공격해 오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더욱이 연개소문 사후, 세 아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당군은 요동지역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평양성에 이르렀고, 신라군은 남쪽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평양성에 이르렀습니다.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에워싸자 연개소문을 이어 대막리지의 직위를 이은 장남 연남생이 요동 일대를 당나라에 바치면서 항복하였고(668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통치하였습니다.
(4) 고구려의 부흥운동
당은 고구려 영토에 당의 지방관제를 도입하여 직접 지배하려 하였으며 고구려 왕족을 위시한 지배층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때, 고연무와 검모잠이 왕자 안승을 옹립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하는 등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백제의 부흥운동을 진압했던 신라지만, 당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합니다. 하지만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부흥운동은 결국 실패합니다.
3) 나당전쟁과 삼국통일
고구려까지 멸망한 후, 당은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평양 이남의 백제와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였고 신라마저 지배하려 했습니다.
이에 신라는 금마저(전북 익산)에 보덕국을 세우고 안승을 왕으로 삼아 당에 대항케 하는 등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고, 당군과 전면 전쟁을 시작합니다. 신라군은 먼저 백제 지역에서 당군을 축출하고 당군을 매소성에서 크게 물리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합니다. 당군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금강 하구의 기벌포를 습격했다가 신라 수군에게 크게 패합니다(기벌포 전투). 이 무렵 티베트 고원의 토번이 당을 침략하여 수도 장안을 위협합니다. 당 고종은 어쩔 수 없이 한반도의 군대를 철수시켜 토번전에 투입하게 되고(676년),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룩합니다.
3-2. 통일신라와 발해의 발전
1) 강력한 왕권의 확립
삼국통일로 전쟁이 끝나고 대외관계와 정치가 안정되었습니다. 진덕여왕의 사후, 성골이 단절되자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김춘추(태종 무열왕)가 왕위를 계승하여 왕권을 다지고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660년).
이어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재위 661~681년)은 삼국통일을 완성시켰습니다. 당, 일본과 외교를 강화했고, 국내 정치 안정을 위해 일부 진골 귀족을 숙청시켰습니다. 신문왕은 장인인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했고, 통치조직을 정비하며 귀족세력을 견제하여 국왕의 지배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문무왕과 신문왕의 노력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무열왕계가 한동안 독점적으로 왕계를 승계합니다.
사실 삼국의 대립을 거쳐 통일을 이룬 과정은 전쟁의 연속으로서, 전시체제하에서는 자연스럽게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② 통치제도의 정비를 합니다. 우선 군사제도를 9서당(중앙군), 10정(지방군)으로 정비하였고, 공작부, 예작부를 설치하여 (집사부 포함) 14부 체제가 완성됩니다. 집사부가 총괄하고 13부가 6조 업무를 분담하는 6조 체제로 바뀐 것이지요. 또한 지방 행정제도를 9주 5소경으로 편제합니다(통일 전 5주 2소경).
③ 국학을 설치합니다. 이는 골품제에 근거한 귀족 출신의 관료 대신 유학 교육을 통한 고급 관리를 양성하기 위함이고, 궁극적으로는 진골 귀족이 아닌 새로운 관료 세력 육성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국학과 연계된 관료 선발제도를 갖추지 못한데다가 귀족세력의 반발로 관직 임용에서 여전히 골품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대 원성왕 때 독서 삼품과를 실시하여 관료 선발 제도의 변화를 추구하였으나 역시 귀족 반발로 실패하였습니다. 유학 교육을 받은 6두품 세력들은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음으로써 하대에 반신라, 반체제적인 경향을 띠게 됩니다.
④ 관료전을 지급합니다. 해당 지역에서 공물이나 노동력까지 징발할 수 있는 권리까지 포함한 토지를 제공하는 제도인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 인정되는 관료전을 지급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귀족의 강한 반발로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하게 됩니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재위 719~737년)은 옛 고구려 땅을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 또한 '인안'이라는 자체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발해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당은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흑수말갈과 연합하여 발해를 압박하였습니다. 발해는 반대로 산둥지방을 공격하여 대응하였고 결국 발해를 압박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무왕의 아들 문왕(재위 737~793년) (3성 6부 체제 확립)은 당과 친선관계를 맺고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긴 다음, 당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전제왕권을 확립한 신문왕(재위 681~692년)
① 즉위 후 장인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하면서 귀족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합니다. 또한 6두품 및 고구려와 백제의 구 지배층을 등용하여 귀족세력을 견제합니다.
② 통치제도의 정비를 합니다. 우선 군사제도를 9서당(중앙군), 10정(지방군)으로 정비하였고, 공작부, 예작부를 설치하여 (집사부 포함) 14부 체제가 완성됩니다. 집사부가 총괄하고 13부가 6조 업무를 분담하는 6조 체제로 바뀐 것이지요. 또한 지방 행정제도를 9주 5소경으로 편제합니다(통일 전 5주 2소경).
③ 국학을 설치합니다. 이는 골품제에 근거한 귀족 출신의 관료 대신 유학 교육을 통한 고급 관리를 양성하기 위함이고, 궁극적으로는 진골 귀족이 아닌 새로운 관료 세력 육성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국학과 연계된 관료 선발제도를 갖추지 못한데다가 귀족세력의 반발로 관직 임용에서 여전히 골품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대 원성왕 때 독서 삼품과를 실시하여 관료 선발 제도의 변화를 추구하였으나 역시 귀족 반발로 실패하였습니다. 유학 교육을 받은 6두품 세력들은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음으로써 하대에 반신라, 반체제적인 경향을 띠게 됩니다.
④ 관료전을 지급합니다. 해당 지역에서 공물이나 노동력까지 징발할 수 있는 권리까지 포함한 토지를 제공하는 제도인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 인정되는 관료전을 지급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귀족의 강한 반발로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하게 됩니다.
2) 통치조직의 개편
중앙행정은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했으며, 위화부·창부 등 10여 개의 관청이 행정을 나누어 맡았으며, 집사부의 책임자인 시중은 나라의 행정 업무를 총괄했습니다. 경덕왕 때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 행정조직의 명칭을 한식(漢式)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이전의 명칭으로 환원하였습니다.
통일신라는 통일 후 영토가 확대되자 지방 통치조직을 새롭게 재편하였습니다. 신문왕은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밑에 군과 현을 두어 도독과 태수, 현령 (6두품) 등의 관리를 파견하였습니다. 지방 관리를 감찰하기 위해서 주와 군에 외사정을 파견하고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수도가 국토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지방의 중심지에 5개의 작은 서울, 5소경을 설치하였습니다. 소경은 다시 6부로 구획하였고 가야와 고구려 유민 일부 역시 거주케 하였습니다.
군사제도 역시 개혁하였는데, 수도를 방위하는 중앙군은 9서당으로 정리하고, 지방의 9주에 별도로 10정을 두어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9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말갈인까지 포함시켜 민족의 융합을 꾀하였습니다.
3) 발해의 건국(698년)과 발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역에 대해 당은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하고자 했으나 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심해지자 당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내세워 고구려 유민을 무마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 유민들의 민족 의식을 각성시켰으며 보장왕도 당의 의도와는 달리 고구려 부흥을 꾀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요동 동북쪽의 천문령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지린성의 동모산에서 국호를 '진'이라 하였고 대조영(재위 698~719년)이 건국하였는데 추후 국호를 바꾼 것이 바로 발해입니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재위 719~737년)은 옛 고구려 땅을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 또한 '인안'이라는 자체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발해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당은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흑수말갈과 연합하여 발해를 압박하였습니다. 발해는 반대로 산둥지방을 공격하여 대응하였고 결국 발해를 압박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무왕의 아들 문왕(재위 737~793년) (3성 6부 체제 확립)은 당과 친선관계를 맺고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긴 다음, 당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여담이지만 공주들의 무덤이 수능 국사에서 주로 다루어진다고 합니다.
문왕에게는 無名의 장녀와, 차녀 정혜공주, 3녀 정연공주, 4녀 정효공주가 있었습니다. 이 공주들은 모두 아버지 문왕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모산 근처 육정산에서 출토된 차녀 정혜공주(777년 사망)묘는 고구려 양식 무덤(굴식돌방, 모줄임구조)임에 비해 중경 부근 용두산에서 출토된 4녀 정효공주(792년 사망)묘는 고구려 + 당나라 양식 무덤(모줄임, 벽돌무덤, 벽화)가 확인되는데, 이는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와 당나라의 문화를 균형있게 받아들인 사례로 거론되며, 비문에는 문왕을 황상으로 칭하고 있어 발해가 외왕내제를 했다는 것 역시 확인됩니다.
문왕에게는 無名의 장녀와, 차녀 정혜공주, 3녀 정연공주, 4녀 정효공주가 있었습니다. 이 공주들은 모두 아버지 문왕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모산 근처 육정산에서 출토된 차녀 정혜공주(777년 사망)묘는 고구려 양식 무덤(굴식돌방, 모줄임구조)임에 비해 중경 부근 용두산에서 출토된 4녀 정효공주(792년 사망)묘는 고구려 + 당나라 양식 무덤(모줄임, 벽돌무덤, 벽화)가 확인되는데, 이는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와 당나라의 문화를 균형있게 받아들인 사례로 거론되며, 비문에는 문왕을 황상으로 칭하고 있어 발해가 외왕내제를 했다는 것 역시 확인됩니다.
4) 해동의 융성한 나라
딸바보였던 문왕은 모든 공주들을 본인보다 먼저 떠나보내고 마지막 4녀 정효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1년도 채 안된 79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문왕의 장남 역시 문왕보다 먼저 사망했던 관계로 후계 구도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고 이후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다툼이 계속되었습니다.
발해의 10대 국왕인 선왕(재위 818~830년)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대외정복에 나섭니다. 먼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정벌하였고 남쪽은 대동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연해주까지 영토를 확보하였습니다. 광대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지방 통치조직을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였습니다.
이렇듯 세력이 크게 커지자 당에서는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9세기 말부터 내분을 겪으면서 국력이 약해지다가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926년)합니다.
5) 발해의 통치체제와 대외관계
왕 | 3성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
정당성(당의 상서성) : 정책 집행, 합의기구 그 장관인 대내상이 총괄 : 국무총리와 같은 최고관직, 고구려의 대막리지 백제의 상좌평(대좌평) 신라의 상대등 |
좌사정 조선의 이·호·예조 |
6부 | 충부 내무, 인사 |
인부 조세, 재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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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부 외교, 교육,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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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정 조선의 병·형·공조 |
지부 군사, 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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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 형벌, 법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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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산업, 교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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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성(당의 문하성) : 장관은 좌상, 정책을 심의하고 여론을 국왕에게 알림 | |||||
중대성(당의 중서성) : 장관은 우상, 정책 기초를 다지고 국왕의 명령을 하달 | |||||
왕의 다른 직속기구 |
문적원(비서) : 서적 관리를 맡음 | ||||
중정대(감찰) : 관리들의 비위를 감찰 | |||||
주자감(교육) : 중앙의 최고 교육 기관 | |||||
5경 15부 62주 //5경: 상, 중, 남, 서, 동 15부: 도독 |
발해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다가, 문왕 때부터 당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통치조직을 새로 마련하였습니다.
3-3. 통일신라, 발해의 사회와 경제
1) 귀족의 경제생활
삼국통일 이전 신라에서는 진골 관리에게는 녹읍을, 하급 관리에게는 해마다 곡물을 녹봉으로 지급하였는데, 삼국 통일 이후 영토가 확대되고 인구가 늘어나자 농민에 대한 국가의 행정력을 강화하기 위해 31대 신문왕은 우선 녹읍 대신 세금을 걷을 권리인 수조권만을 인정하는 관료전을 지급(687년)하고, 끝내 녹읍을 혁파하며 진골 관리에게도 곡물을 녹봉으로 지급하였습니다(689년).
8세기 중반 이후 35대 경덕왕은 녹읍을 부활(757년)시켰는데, 이는 녹봉제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과 녹봉 지급에 따른 행정적인 번거로움 등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귀족들은 황금으로 치장한 집인 금임택 에 거주하였습니다.
2) 촌락문서와 농민생활
▶ 촌락문서
통일신라시대 서원경(충북 청주) 근처 4개 촌락의 여러 가지 경제상황을 기록한 문서로, 3년에 한 번씩 조사한 촌락의 인구 수, 소와 말, 뽕나무와 잣나무, 호두나무의 수, 논과 밭의 면적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농민들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관리하여 세금을 잘 거두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습니다.
▶ 농민들의 생활
경제 형편을 고려하여 농민 가호를 9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조(租; 벼나 곡물을 징수하는 세금)/용(庸; 군역의 의무)/조(調; 비단이나 삼베를 징수) 를 부과하였습니다.
통일신라는 수취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33대 성덕왕(재위 702~737년) 때에는 농민에게 정전을 지급하였고(722년), 흉년이 드는 해에는 가난한 농민에게 곡물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3) 발해의 사회와 경제
발해의 왕족은 대씨이고, 고·장·양·이·하·오씨 등이 귀족의 성이었습니다.
귀족의 아래에 평민이 있었고, 천한 신분으로 부곡과 노비가 존재하였습니다. 피지배층은 말갈인이 중심이었습니다.
발해의 영토는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조와 보리, 기장 등 잡곡을 재배하였습니다. 말은 발해의 대표적인 수출품이었으며 그 외에도 수공업이 발달하여 우수한 철과 베, 비단 등의 직물도 특산품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발해는 조공도와 영주도를 이용하여 당과 무역하였고, 산둥반도의 등주에 발해관이라는 숙소를 설치하여 발해인들이 이용하게 하였습니다.
3-4. 통일신라와 발해의 문화
상대(삼국시대) - 도교 전래 | 중대(통일신라시대) - 선종 전래 | 하대 | |
---|---|---|---|
불교 | 전진→고구려(소수림왕, 372년)→신라(법흥왕+이차돈 순교 527년) 동진→ 백제(침류왕, 384년)→일본 특징: 왕실중심, 귀족불교 업설, 호국불교(세속오계, 황룡사 9층목탑, 문무왕릉), 민간 신앙 흡수(칠성각, 산신각) |
★원효: 불교의 대중화←정토종(아미타신앙↑-극락세상) :십문화쟁론, 원융회통사상(서로 다른 쟁론을 화합한다), 일심사상(덧없음) ★의상: 화엄종↑(일즉다, 다즉일→왕권강화), 관세음사상(현실적), 부석사 중심(무량수전) 고려시대때 복원 ○혜초: 왕오천축국전(인도) - 지리지 8세기 ※한편 발해의 지배층 사이에서 불교가 널리 유행하였는데, 특히 문왕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습니다. |
선종유행←풍수지리(도선) ※신라 중대에 융성했던 교종(화엄종, 법상종 등)은 경전을 중시하고 특정 경전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체계화. 이에 반해 선종은 직관적인 종교체험으로서 선을 중시합니다. (또한 이 당시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린 교리를 내세워 인기를 끌었습니다.) 지방호족+6두품 = 고려(최승로의 시무책은 받아들여짐) |
교육기관 유교 기타 |
<교육기관> ○고구려 중앙: 태학(소수림왕-율령, 불교, 태학) 지방: 경당(유학+무술) - 평양천도 이후 <유교> ○고구려: 소수림왕이 태학과 경당을 세워 유교와 무예등을 가르침 ○백제: 5경 박사 직접적인 사료가 없으나, 박사라는 호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교 교육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임신서기석 ※신라 청소년들이 유교경전 학습을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하는 내용의 비석. <역사> ○고구려: 유기(영양왕)→고구려 초기 역사서 ○백제: 서기(근초고왕) ○신라: 국사(진흥왕) |
<교육기관> ○발해: 주자감 ○신라: 국학 (신문왕이 설치함) ※원성왕은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에 따라 관리로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788년)하였습니다. <유학자> 설총: 화왕계 ※설총은 한자의 뜻과 음을 우리말로 표현하는 이두를 정리하여 유학 경전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김대문: 고승전, 화랑세기, 한산기(한산주 도독) |
<유학자> 최치원: 계원팔경, 토황소격문, 시무책 건의 (6두품) |
3-5. 통일신라의 동요와 멸망
1) 왕위 다툼의 격화와 농민항쟁
무열왕계의 강력한 왕권은 8세기 말부터 흔들립니다. 36대 혜공왕 때에 96각간의 난이 일어나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혜공왕도 반란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습니다(980년).
이후, 나물왕의 먼 후손인 김양상이 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 때부터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를 하대라고 합니다. 하대는 155년 동안 20여 명의 왕이 즉위할 정도로 왕위 계승 분쟁이 잦았는데 이는 전국적인 반란으로 이어져 지도층인 웅천주(충남 공주) 도독 김헌창의 반란(822년)을 시작으로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의 반란(841년) 이후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진성여왕 때에 이르자 정치의 문란과 재정 파탄이 극에 달하였고 원종과 애노의 반란 등 농민층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2) 지방 호족의 등장
9세기 말 진성여왕(재위 897~897년) 때 재정 파탄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최치원은 정치 개혁을 위해 시무 10조를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이때, 지방에서 군사를 모아 자위력을 갖추고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부르는 "호족"이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호족은 독자적인 통치 기구를 두어 관리를 임명하고, 자체의 영역을 직접 통치하였습니다.
3) 선종의 수용과 사상계의 변화
신라 중대에 융성했던 교종은 경전과 교리의 이해 중심인 데에 반해 하대에 융성하는 선종은 정신수양-참선이 중심이었고, 누구나 수행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로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지방 곳곳에 선종 사찰이 세워지고 선종 승려들이 풍수지리설을 널리 보급하였습니다. 풍수지리설의 보급은 수도인 금성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지방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됩니다.
4) 후삼국의 분열
진성여왕이 즉위한 시점에서 이미 신라는 혜공왕 때를 기점으로 국력이 쇠해져 있었으며, 그녀가 재위하던 시절(재위 887~897년)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 후고구려를 선포하기 전이었으나 이미 후삼국시대의 기틀이 잡혔습니다.
(1) 견훤의 후백제 건국(900년)
경북 상주 출신이었던 견훤은 호남 지역을 방어하는 군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세력을 키워 완산(전북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900년)합니다.
927년 신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애왕의 이종사촌 형제 김부를 경순왕(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927년)시켰는데, 이를 계기로 신라는 친고려 정책 신라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후삼국의 한 축을 상실했고, 전제왕권을 추구하여 각 지역의 호족들이 거부감을 느껴 더 이상 지지 세력 넓히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건에 의한 해상 봉쇄 등으로 세력 약화되었고,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있었습니다.
이에 질 수 없는 후고구려도 송악(개성)과 철원을 중심으로 중부 내륙을 장악하고 남쪽으로는 죽령을 넘어 상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는 경상도 지역만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후삼국의 경쟁에서 후고구려는 초반부터 우세하였습니다. 궁예는 왕건을 보내 나주를 점령(903년)하고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였습니다.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무태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광평성을 비롯한 중국의 3성 6부를 모방한 정치기구를 설치(904년)하였으며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는 등(905년)의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궁예는 도적 출신으로 토착 기반이 취약해,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집착하였습니다. 이것이 폭정으로 번지면서 결국 왕건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왕건은 이때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연호를 천수로 고쳤습니다(918년)! 왕건은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는 데 그의 온 힘을 쏟습니다. 즉위 이듬해에는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고 개경이라고 칭하였습니다(919년). 송악은 왕건의 본거지였으며, 천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옛수도인 평양을 서경으로 높임으로써 고구려 계승 의식을 더욱 확고히 하고 북진정책의 기지를 확보하였습니다.
고려 건국 이후 후백제와의 대결이 격화됩니다. 후백제는 신라의 금성(경주)를 점령하고 경순왕을 세움으로써(927년)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때 왕건은 금성을 약탈하고 돌아가는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고려군은 크게 패했지만 이때 보여준 고려의 친신라정책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왕건은 고창(경북 안동)전투에서 후백제군에 승리하여 후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확보하였고(930년),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935년)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인 936년 고려군이 선산에서 승리하여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후삼국은 통일됩니다.
호족을 다스리기 위한 채찍으로, 정계와 계백료서(신하들이 지켜야 할 규범)를 반포했으며, 훈요십조(후손들이 군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책)를 남겼습니다.
또한,
② 과거제도 실시(958년): 귀화인 쌍기의 건의,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 국왕에게 충성하는 신진관료를 등용하는 동시에 호족들이 관리가 되는 것을 제한하는 효과를 거뒀습니다. 이후 과거제도는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리 선발제도로서 900년 이상 존속합니다.
④ 독자적인 연호 사용 : 광덕(949년), 준풍(960년) 등
그녀는 목종이 섭정이 필요없는 나이임에도 섭정을 계속하였고 내연남 김치양을 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목종은 이를 저지하지 못하고 본인의 스트레스를 유행간과의 남색으로 풀었고 이후 고려사 최초로 신하에 의해 폐위되고 시해당하게 됩니다.
(2)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901년)
신라 왕족 출신을 자처한 궁예는 처음에는 북원(강원 원주)에서 활동하던 양길이라는 사람의 부하로 들어갔다가, 양길을 몰아내고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건국(901년)하였습니다.
후백제와는 다르게, 신라와 다른 통치체제를 정하였습니다(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 9관등제). 초기에는 군사들과 함께하며 백성의 편에 섰던 궁예지만,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다가 왕건을 비롯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살해(918년)되었습니다.
○ 후백제와 후고구려 건국 이후, 신라는 경주와 그 인근 지역을 겨우 통제할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졌습니다.
4-1. 후삼국 통일과 중앙집권화 정책
1)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견훤의 후백제는 완산주(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를 차지하고 동쪽으로는 대야성(합천) 등 신라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에 질 수 없는 후고구려도 송악(개성)과 철원을 중심으로 중부 내륙을 장악하고 남쪽으로는 죽령을 넘어 상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는 경상도 지역만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후삼국의 경쟁에서 후고구려는 초반부터 우세하였습니다. 궁예는 왕건을 보내 나주를 점령(903년)하고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였습니다.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무태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광평성을 비롯한 중국의 3성 6부를 모방한 정치기구를 설치(904년)하였으며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는 등(905년)의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궁예는 도적 출신으로 토착 기반이 취약해,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집착하였습니다. 이것이 폭정으로 번지면서 결국 왕건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왕건은 이때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연호를 천수로 고쳤습니다(918년)! 왕건은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는 데 그의 온 힘을 쏟습니다. 즉위 이듬해에는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고 개경이라고 칭하였습니다(919년). 송악은 왕건의 본거지였으며, 천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옛수도인 평양을 서경으로 높임으로써 고구려 계승 의식을 더욱 확고히 하고 북진정책의 기지를 확보하였습니다.
고려 건국 이후 후백제와의 대결이 격화됩니다. 후백제는 신라의 금성(경주)를 점령하고 경순왕을 세움으로써(927년)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때 왕건은 금성을 약탈하고 돌아가는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고려군은 크게 패했지만 이때 보여준 고려의 친신라정책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왕건은 고창(경북 안동)전투에서 후백제군에 승리하여 후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확보하였고(930년),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935년)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인 936년 고려군이 선산에서 승리하여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후삼국은 통일됩니다.
2) 태조 왕건의 정책
(1) 대 호족 정책
상주의 호족이자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 등 많은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였습니다.
① 결혼 정책: 중요 지역 호족의 딸들과 혼인(29명의 부인을 둠)
② 역분전: 통일 과정의 공로를 따져 토지를 지급함
③ 사성 정책: 유력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는 정책 실시
④ 지방 호족들의 지위 인정: 통일에 협력한 호족들을 삼한공신에 책봉(3,200명가량 됨)
① 결혼 정책: 중요 지역 호족의 딸들과 혼인(29명의 부인을 둠)
② 역분전: 통일 과정의 공로를 따져 토지를 지급함
③ 사성 정책: 유력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는 정책 실시
④ 지방 호족들의 지위 인정: 통일에 협력한 호족들을 삼한공신에 책봉(3,200명가량 됨)
(2) 기타 정책
왕건은 민생안정을 위한 정책으로 흑창(흉년이나 춘궁기를 비롯한 비상시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곡식을 거두는 가을에 되갚게 하는 제도)와 취민유도(세금을 수취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유교적 민본 이념을 나타냄, 세금을 1/10로 줄여줌)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호족을 다스리기 위한 채찍으로, 정계와 계백료서(신하들이 지켜야 할 규범)를 반포했으며, 훈요십조(후손들이 군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책)를 남겼습니다.
또한,
① 사심관 제도: 호족을 연고가 있는 지방의 사심관으로 삼아 그 지방의 치안을 책임지도록 함(상대적으로 미약했던 중앙 권력이 지방 세력을 다스리고 지역의 부세 및 역역 등을 통제하려는 의도)
※신라의 상수리 제도→고려의 기인 제도→조선의 경저리(경주인) 제도로 계승됩니다.
와 함께
② 기인제도: 지방 호족의 자제들을 뽑아 서울에 머물게 하는 제도
를 펼쳤는데, 이는 사실상 호족의 자제들을 인질로 잡아 둠으로써 지방 세력을 견제 및 회유하기 위해 둔 제도였습니다. 한편 기인을 배출하여 중앙과 관련을 갖게 된 지방 호족은 세력 기반을 인정받는 면이 있었습니다.
② 기인제도: 지방 호족의 자제들을 뽑아 서울에 머물게 하는 제도
를 펼쳤는데, 이는 사실상 호족의 자제들을 인질로 잡아 둠으로써 지방 세력을 견제 및 회유하기 위해 둔 제도였습니다. 한편 기인을 배출하여 중앙과 관련을 갖게 된 지방 호족은 세력 기반을 인정받는 면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여 국호를 고려라 한 만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배척하였고 서경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아 국경선을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선까지 확장하였습니다.
3) 고려 초의 중앙집권화 정책
태조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의 정치는 불안정하였고, 태조 사후 후계를 둘러싸고도 호족들 간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29명의 부인을 두었기 때문에 왕자도 많았습니다.. 태조 사후 장자인 세자가 2대 혜종으로 즉위했으나 재위 2년 만에 죽었고,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 동생인 왕자 요가 3대 정종으로 즉위한 후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이후 서경으로 천도하려다 실패하고 재위 5년만에 죽었습니다.
다행히도(?) 정종 사후 정종의 또 다른 이복 동생인 4대 광종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왕권 강화를 추진하면서 고려는 안정화됩니다.
(1) 4대 광종(재위 949~975년)의 왕권 강화 정책
① 노비안검법: 노비 중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켰습니다. 이는 호족들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약화되는 동시에 양인이 확보되어 국가 수입 증대 효과를 거둡니다.
③ 백관의 공복 제정(960년): 관리들 사이의 위계를 세웠습니다. 이는 국왕이 직접 백관의 의복을 제한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다잡고 후삼국 통일 이후 엉망이 된 조정 내 서열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신하들은 의복 제도를 무시하고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조정에 나타나서 패션쇼를 벌였던 사치를 제한하고자 하였습니다.
④ 독자적인 연호 사용 : 광덕(949년), 준풍(960년) 등
⑤ 수도제도 개편(960년): 개경(황도), 서경(서도)로 불러 황제로서의 권위를 세웁니다.
⑥ 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960년)하였습니다. 공복 제정 역시 저항이 컸으나, 공포정치로 인해 저항이 수그러들었습니다.
하지만 광종의 호족 억압정책은 단기적으론 효과를 거두었으나 광종이 죽자, 극심한 혼란을 불러왔습니다. 이는 성종이 즉위한 뒤에야 진정됩니다.
○ 5대 경종은 20살에 즉위해 26살에 요절하였는데, 광종의 대숙청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에 빠진 조정을 안정화시키고 전시과라는 토지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고대에는 수조권적 지배질서인 전주전객제가 우세하였지만, 생산량의 증가와 소유권의 성장으로 인하여 지주전호제가 점점 성장, 조선시대쯤에는 지주전호제가 우세하게 되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수조권적 지배질서인 전주전객제가 우세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나무위키의 전시과 항목을 살펴보아도 좋을 거 같습니다.
(2) 6대 성종(재위 981~987년)의 유교 정치
경종은 말년에(라고 해도 26살인데 붕어..) 병으로 쓰러졌을 때, 그의 아들은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본인의 사촌동생이자 누이 문덕왕후의 남편인 (아내들의 오빠이자 아들의 외삼촌 겸 고모부 겸 당숙이기도 한) 성종에게 선위하였습니다.
(새 나라가 국초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굳건한 권력기반을 필요로 했는데 이를 위해 근친혼과 자매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청상과부가 된 ‘왕비 자매’의 아찔한 사랑 삼촌과 통정해 낳은 사생아, 왕이 되다 라는 칼럼을 읽어보는 것도.. 근데 사실 시간 낭비..)
① 시무 28조: 학자 출신의 최승로가 올린 것으로,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호족 세력을 포용하고, 불교 폐단이었던 팔관회와 연등회를 즉위 직후 폐지합니다. 또한 광종 대 실시했던 노비안검법을 철폐하여 노비에서 양인으로 해방된 자를 다시 천민으로 돌리는 노비 환천법을 시행합니다(...)
② 중앙 정치기구 정비: 중국의 6성 6부를 모방하여, 2성 6부(3성 6부일 수도 있다고 함), 중추원-중서문하성 양부 체제 로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신라의 관등이자 신분제인 골품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관등을 짜야만 했는데, 태조 왕건은 9품 16등위로 만들었으나 성종은 북송의 품계를 도입하여, 문관의 문산계/무관의 무산계로 나누고 15품을 적용하였습니다.
③ 지방제도 개편 및 지방관 파견: 전국을 10도와 12목으로 나누고, 처음으로 그 12목에 지방관 파견하여 호족들의 권한 약화를 주도하고자 했습니다.
④ 호족들이 만들어놓은 향직을 고쳐, 지방 호족을 향리로 격하합니다.
사족: 성종의 개혁이 진행되던 와중 거란이 쳐들어와 왕이 키운 지방군이 박살나면서 본인이 탄압했던 지방세력에게 군사를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지방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는데 여기에는 팔관회 및 연등회를 복구한다는 내용과 지방세력의 존재를 인정하는 주현-속현 체제의 인정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개혁의 도로아미타불
⑤ 지방 호족의 자제들을 뽑아 서울에서 교육시키고, 지방에 학교를 세우기도 하는 등, 국자감을 정비합니다.
※여담: 우선 본인이 한창 젊을 때 경종의 아들(이자 누나 천추태후의 아들)인 왕송(7대 목종이 됨)을 후계자로 선포함으로써 더이상 국왕 사후 내전이 벌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안종과 헌정왕후가 불륜을 저질러 사생아까지 낳는 스캔들이 벌어졌음에도 안종을 유배시키는 선에서 끝냈고, 헌정왕후가 사망하자 둘의 아들인 현종을 불쌍히 여겨 안종의 곁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친동생으로는 유명한 천추태후(태조 왕건의 손녀, 5대 국왕 경종의 3비, 6대 국왕 성종의 여동생, 7대 국왕 목종의 모후, 8대 국왕 현종의 이모이자 사촌누나)가 있습니다.
거란 소손녕의 침입(거란의 1차 침입)으로 평양 이북을 넘겨줄 뻔 했으나 문신 서희의 정확한 판단과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한 것도 이 때입니다. 사직 종묘를 처음으로 도입합니다.
38세 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붕어합니다.
불교 | 연등회,팔관회 | 유교적 정치 | 민생 안정책 | 자주성 강조 | 기타 | |
---|---|---|---|---|---|---|
최치원 시무 10조 (신라 하대) |
O | 골품제도 비판, 과거제 실시 | ||||
왕건 훈요 10조 (고려 초기) |
중시 | 장려 | O | O | 후대 왕에 대한 가르침, 북진 정책 추진, 풍수지리 강조, 서경 중시 | |
최승로 시무 28조 (고려 성종) |
비판 | 폐지 | O | O | O | 5조 정적평, 지방관 파견, 귀족 정치 지양, 노비 환천법 |
최충헌 봉사 10조 (고려 무신집권기) |
제한 | O | 귀족 불법적 토지 겸병 금지, 승려 고리대업 금지, 탐관오리 징벌, 사치 금지 |
4-2. 고려의 지배체제와 사회
1) 정치제도의 정비
고려의 정치제도는 성종부터 문종에 이르는 시기에 정비되었습니다.
학자에 따라선 성종이 2성 6부제(중서문화성·상서성)을 도입했다고도, 3성 6부제(중서성·문화성·상서성)을 도입했다고도 하나 크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1) 행정조직
(2) 지방제도
지방관이 파견된 군현을 주현, 그렇지 않은 군현을 속현이라고 하였으며 향·소·부곡 등 특수 행정구역이 설치되었습니다.
(3) 전시과
★ 976년(경종 1)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1076년(문종 30)에 완성됩니다.
이는 모든 관리와 향리, 군인 등 직역을 지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면적의 토지에서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을 지급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농민들은 자기 소유지에서 생산량의 1/10을 국가에 조세로 내게 되어 있는데, 이를 수조권자가 대신 받아가도록 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차. 시정 전시과: 경종 원년(976년)
○ 시대적 배경: 광종의 공포정치로, 귀족세력의 힘이 빠져서 가능하였음.
○ 주요 내용
- 광종 때 정한 4색 공복제를 바탕으로 인품(그 사람의 공로, 가문 등), 관품에 따라 문무 전현직 관리(직관, 산관)에게 줌.
- 전(田)과 시(柴)의 분급량이 엇비슷.
2차. 개정전시과: 목종 원년(998년)
○ 시대적 배경: 이전 성종 때 완성된 18품 품계를 바탕으로 제도를 정비.
○ 주요 내용
- 전시(田柴)분급액의 감소
- 군인층이 토지분급대상에 포함
- 토지의 부족으로 실직(實職)위주의 분급
- 원윤(元尹)미만의 하위 향직소유자에게는 더 이상 토지를 분급하지 않음.
- (인품X) 관품따라 문무 전현직 관리에게 줌.
- 무반에 대한 문반의 우위
- 이와 관련해서 일어난 김훈과 최질의 난이 있음.
3차. 덕종 3년(1034)에 다시 개정.
*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음.
4차. 경정(更定)전시과: 문종 30년(1076년)
○ 시대적 배경: 고려사회가 가장 난숙한 가운데, 쇠퇴의 조짐을 보임. 이에 대한 개혁적 조치로 전시과를 개정
○ 주요 내용
- 극심한 토지의 부족으로 현직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
- 전시(田柴) 급여액의 감소(특히 시지 분급 격감)
- 그에 비해 군인전은 오히려 증액. 또한 무반도 대우 상승. 무과가 실시되는 것도 이즈음.
○ 시대적 배경: 광종의 공포정치로, 귀족세력의 힘이 빠져서 가능하였음.
○ 주요 내용
- 광종 때 정한 4색 공복제를 바탕으로 인품(그 사람의 공로, 가문 등), 관품에 따라 문무 전현직 관리(직관, 산관)에게 줌.
- 전(田)과 시(柴)의 분급량이 엇비슷.
2차. 개정전시과: 목종 원년(998년)
○ 시대적 배경: 이전 성종 때 완성된 18품 품계를 바탕으로 제도를 정비.
○ 주요 내용
- 전시(田柴)분급액의 감소
- 군인층이 토지분급대상에 포함
- 토지의 부족으로 실직(實職)위주의 분급
- 원윤(元尹)미만의 하위 향직소유자에게는 더 이상 토지를 분급하지 않음.
- (인품X) 관품따라 문무 전현직 관리에게 줌.
- 무반에 대한 문반의 우위
- 이와 관련해서 일어난 김훈과 최질의 난이 있음.
3차. 덕종 3년(1034)에 다시 개정.
*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음.
4차. 경정(更定)전시과: 문종 30년(1076년)
○ 시대적 배경: 고려사회가 가장 난숙한 가운데, 쇠퇴의 조짐을 보임. 이에 대한 개혁적 조치로 전시과를 개정
○ 주요 내용
- 극심한 토지의 부족으로 현직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
- 전시(田柴) 급여액의 감소(특히 시지 분급 격감)
- 그에 비해 군인전은 오히려 증액. 또한 무반도 대우 상승. 무과가 실시되는 것도 이즈음.
2) 신분제
전근대의 신분제는 양인과 천민을 구분하는 양천제를 기본으로 하였습니다만, 양인 신분의 구성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지배층 | 귀족 왕족, 5품 이상 문무양반 |
양반 | 직능이나 품계별로 세부적인 차이가 있었었으며, 문반이 재추직을 독점, 3품 이상은 치사의 혜택(벼슬에 물러나도 반액의 녹봉이 지급), 6품 이상의 참상은 조회에 참여하여 국정을 의논할 수 있었습니다. |
---|---|---|---|
※ 고려는 양반이 내시(왕의 근시직)가 되었음 (조선시대에는 환관이 내시) | |||
사족 (관인 신분계층) | 가부장적 대단위의 족적 편제를 이루어 향관과 성을 가지며, 그들만의 양반 호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 ||
무반 | 그 일부만이 귀족층에 포함되었고 무반은 재상이 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 ||
중간계층 | 향리 | 호장 부호장을 대대로 배출하는 지방의 실질적 지배층으로 중앙의 하위 품관들과도 통혼하는 관계이나, 과거 응시자격에서도 하위의 향리층과 구별되었습니다. 제술업이나 명경업에 나아가는 경우에는 그 아들은 부호장 이상의 향리 자제에 한하였습니다. 향역의 세습이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일이었는데, 향리 아들 가운데 최소한 1명은 향역의 세습이 먼저였으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는데, 향리 아들 가운데 하나는 기인이 되어 중앙의 서리직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를 통하여 품관으로 진출하는 것이었습니다, | |
말단 행정직 (남반, 군반, 잡류, 하층 향리, 역리) |
남반(궁중 실무관리), 군반(직업군인), 잡류(말단 서리), 하층 향리, 역리가 이에 속하며 직역의 세습과 그에 상응하는 토지를 국가에서 받았습니다. 중간계층의 지배층에서 소수나마 재추 등의 고관이 배출되었습니다. 극소수는 문벌층과 통혼하며 문벌층으로 상승해가는 경우도 있었고 간혹 남반, 군반, 잡류의 후손 중에서 품관으로 진출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승급에 제한을 두는 한품제가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 ||
서리(사무직) | 중앙행정실무직인 서리는 문음자제들의 음직으로 주어지거나 기인거관자들의 입사로 이용되어 지방 향리들이 서리직을 통하여 중앙으로 진출하여 양반이 되는 통로로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서리들은 수령취재시험을 거쳐 수령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서리가 양반이 될 수 있는 길) | ||
기술관 | 고려시대에는 기술관에 대한 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기술관에게는 녹봉은 물론 전시과의 제15과부터 제16과가 지급되었고, 잡과시험을 통하여 기술관직을 차지하였고 양반자제들도 기술관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 ||
남반 | 궁중 실무 관리로 국왕 측근의 내료직으로, 국왕의 입장에서 중시하여 남반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반열을 이루었으나, 양반관료체제가 정비될수록 천직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목종 때 최고 4품까지 상한직으로 삼았으나 점차 7품 이하) 결국, 고려시대의 남반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남행으로 전락되어 문음자제들의 진출로로 전락하게 되었다. | ||
피지배층 | 양인 양인 신분을 당시의 현실적인 경제력에 기초하여 국가의 직역체계에 편제된 정호와 직역을 지지 않는 백정으로 구분하였다. |
정호(백성이라고도 불림) | 군인호, 기인호(其人戶), 역호(役戶) 등과 같은 국가에 대해 일정한 특정한 직역을 부담하였습니다. 직역 수행의 대가로 토지가 분급되었으며, 이들은 품관으로 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정호는 백정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유한 층으로 중앙정부에서는 경제적으로나 신분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계층을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직역에 종사하게 하고 그 대신에 그들의 소유지나 타인의 소유지에 일정한 부분에 대한 수조권을 지급하였습니다. |
백정 | 백정이란 명칭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 받지 못한 대신 국가에 대해 일정한 직역이 없다는 뜻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고려의 백정은 조세 ∙ 공납뿐 아니라 각종 잡역에 동원됩니다. | ||
잡척 | 조세, 공부, 역역 외에 추가로 국가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각종 수공업 제품, 광품 등을 생산하는데 동원되어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사회적으로도 천대받았습니다. | ||
농민 | 상인과 수공업자는 농민보다 천시되었으나 양인으로서 공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문무의 관직에 나가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음) 평민 중에서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자는 농민에 비해 지위가 떨어지고 출세의 제약이 더 컸습니다. | ||
상인과 수공업자 | |||
신량역천 | 향·소·부곡, 장·처·진 ∙ 관 ∙ 역 등의 행정구역에 사는 주민으로 공적 ∙ 사적 권리의 일부가 박탈되어 어느 정도 천민같은 대우를 받는 계층을 말하며, 국가에 대해 직역 등을 부담하는 등 양인으로서 의무를 진 점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일반 군현민에 비하여 관직 진출과 교육 등에서 법제적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 ||
천인 | 공·사 노비, 향·소·부곡민 등 | 국가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에 속한 사노비로 나누어짐/사노비는 주인집에 살며 잡일을 하는 솔거노비와 따로 살면서 신공을 바치는 외거노비로 구분되었습니다. |
(1) 음서제와 공음전시법 등
① 음서제: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초직을 수여하는 제도로 관직 진출의 특혜였습니다.
② 공음전시법: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토지를 지급한 것으로, 전시과에 비해 면적은 작았지만 상속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커다란 특혜였습니다.
③ 일천즉천: 양인과 천민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일천즉천의 원칙에 따라 모두 천민이 되었고, 주인이 다른 사노비들끼리 혼인해서 낳은 자식은 천자수모법에 의해 어머니의 소유주에게 귀속되었습니다.
3) 일상생활
① 본관에 따른 차별 : 본관에는 주현, 속현, 부곡 등의 서열이 있었습니다.
② 가족 구성 :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했으며, 근친혼이나 동성혼을 하기도 함
③ 여성들의 삶 : 여자 쪽 집에서 삶. 재산 소유, 사별 후 재혼이 자유로웠고, 재산 상속, 제사의 의무 등도 남성과 동등했으나 관직 진출 등 사회적 활동에는 여성에 대한 제약과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④ 양인은 결혼한 뒤 여자쪽 집에 들어가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4-3. 10~12세기 고려의 국제적 지위
1) 다원적 국제질서와 고려
① 10~12세기 동아시아에는 다원적 국제질서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5대 왕조, 송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선진 문화 수용에 힘썼습니다. 916년 나라를 세운 거란에 대해서는 발해를 공격해 무너뜨린 무도한 나라라고 인식하여 적대정책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거란은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942년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냈는데, 태조 왕건은 그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모두 개성 만부교 아래에서 굶어죽게 하였습니다.
② 이러한 고려의 친송, 반거란 정책은 거란의 침략을 불러왔습니다. 993년 거란 침략 때(6대 성종)는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거란과 책봉-조공관계를 맺고 강동 6주를 확보하였습니다. 고려는 거듭 거란의 침략을 받았으나 1019년 귀주(평북 구성)에서 거란군을 격파하고 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이후 동아시아에서 고려-거란-송의 세력 균형이 맞춰져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③ 12세기 들어 만주 쑹화강 유역에서 여진 완안부가 일어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변동하였습니다. 완안부가 고려를 침략하자 16대 예종(재위 1105~1122년) 별무반을 조직하고 여진을 공격하여 두만강 너머까지 9개의 성을 설치했다가(1107년) 돌려주었습니다.
④ 여진은 1115년 금을 건국하고 거란(1125년)과 송(1126년)을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를 차지하였습니다. 17대 인종(재위 1122~1146년) 금이 강성한 현실을 받아들여 사대하기로 하였습니다(1126년). 그 뒤 중국 양쯔강 남쪽에 남송이 건국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고려-금-남송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거란(요나라)의 침입
① 1차 침입(993년)
㈀ 고려 성종 때 소손녕이 80만 대군(실제로는 10만 이하의 병력이라는 것이 통설)으로 침입하였습니다. 하지만 강한 저항에 부딪혀//사실 1차 침입 때에는 조그마한 토성 안융진을 공격하고도 패했고, 개성까지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무력 시위의 성격이 강하다고 합니다// 남진하지 않고 계속 고려에 항복을 종용합니다.
이러한 요군의 침입에 고려는 매우 동요하여 항복하자(항복론)/과 항복하면서 땅도 떼우져야 한다(자비령 이북 할양론)으로 나뉘는데, 이때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합니다. 이어진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군이 소손녕의 요군을 격퇴하자 조정이 강화론으로 돌아섰고, 서희가 담판에 나섭니다. ㈁ 서희의 담판: 고려가 거란과 친교를 맺지 않은 것은 여진족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므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넘겨주면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에 협조하겠다고 제의하였습니다. (사실 강동 6주는 엄밀히 따지면 요나라의 영토라기 보다는, 미개발 상태로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여진족(말갈)의 영역이었다고 보아야 함)
㈂ 거란(요나라)는 고려 정복이 목적이 아니므로 강화에 합의하고 철수합니다. 요나라는 주적인 송나라를 치기 전 고려와 협상을 맺어 배후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일 뿐, 고려에서 국력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소규모 전투만을 반복하다가 안융진 전투 이후로 거란 쪽에서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뒤 고려는 잠시나마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쓰면서 거란의 비위를 맞춰주었습니다.
② 2차 침입(1010년)
㈀ 거란은 고려가 계속 송과 교류하는 데다가 고려에 준 강동 6주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반환받고자 하였습니다.
㈁ 거란은 강조의 정변(1009년 목종 12년 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여 정권을 교체)을 구실로 침입하여 개성을 이미 점령하였으나, 현종은 계속 남쪽으로 피난(몽진)하였고 이를 계속 쫓다가는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하여 서둘러 화친을 맺고 고려로부터 강동 6주의 반환과 고려 왕의 배알 등을 약속 받고 철수합니다.
③ 3차 침입(1018년)
㈀ 고려가 약속(국왕의 친조, 강동 6주 반환)을 지키지 않자 소배압이 10만 별동대를 이끌고 침입했으나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대패하였습니다.
㈁ 이후 고려는 개경에 외성인 나성을 쌓고 압록강~도련포에 천리장성 축조하였습니다.
㈂ 거란의 10만 병력을 고려가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요격하는 것을 보고 거란은 다시는 고려에 대규모 전쟁을 걸지 않았습니다. 거란과 고려는 평화 관계를 유지했으나 고려의 북진정책이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려는 당대 동아시아 최강 전력인 거란군을 격멸함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번영의 기틀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① 1차 침입(993년)
㈀ 고려 성종 때 소손녕이 80만 대군(실제로는 10만 이하의 병력이라는 것이 통설)으로 침입하였습니다. 하지만 강한 저항에 부딪혀//사실 1차 침입 때에는 조그마한 토성 안융진을 공격하고도 패했고, 개성까지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무력 시위의 성격이 강하다고 합니다// 남진하지 않고 계속 고려에 항복을 종용합니다.
이러한 요군의 침입에 고려는 매우 동요하여 항복하자(항복론)/과 항복하면서 땅도 떼우져야 한다(자비령 이북 할양론)으로 나뉘는데, 이때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합니다. 이어진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군이 소손녕의 요군을 격퇴하자 조정이 강화론으로 돌아섰고, 서희가 담판에 나섭니다. ㈁ 서희의 담판: 고려가 거란과 친교를 맺지 않은 것은 여진족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므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넘겨주면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에 협조하겠다고 제의하였습니다. (사실 강동 6주는 엄밀히 따지면 요나라의 영토라기 보다는, 미개발 상태로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여진족(말갈)의 영역이었다고 보아야 함)
㈂ 거란(요나라)는 고려 정복이 목적이 아니므로 강화에 합의하고 철수합니다. 요나라는 주적인 송나라를 치기 전 고려와 협상을 맺어 배후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일 뿐, 고려에서 국력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소규모 전투만을 반복하다가 안융진 전투 이후로 거란 쪽에서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뒤 고려는 잠시나마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쓰면서 거란의 비위를 맞춰주었습니다.
② 2차 침입(1010년)
㈀ 거란은 고려가 계속 송과 교류하는 데다가 고려에 준 강동 6주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반환받고자 하였습니다.
㈁ 거란은 강조의 정변(1009년 목종 12년 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여 정권을 교체)을 구실로 침입하여 개성을 이미 점령하였으나, 현종은 계속 남쪽으로 피난(몽진)하였고 이를 계속 쫓다가는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하여 서둘러 화친을 맺고 고려로부터 강동 6주의 반환과 고려 왕의 배알 등을 약속 받고 철수합니다.
③ 3차 침입(1018년)
㈀ 고려가 약속(국왕의 친조, 강동 6주 반환)을 지키지 않자 소배압이 10만 별동대를 이끌고 침입했으나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대패하였습니다.
㈁ 이후 고려는 개경에 외성인 나성을 쌓고 압록강~도련포에 천리장성 축조하였습니다.
㈂ 거란의 10만 병력을 고려가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요격하는 것을 보고 거란은 다시는 고려에 대규모 전쟁을 걸지 않았습니다. 거란과 고려는 평화 관계를 유지했으나 고려의 북진정책이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려는 당대 동아시아 최강 전력인 거란군을 격멸함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번영의 기틀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2) 책봉-조공과 해동천자
① 고려는 건국 초부터 중국의 5대, 송, 거란, 금과 책봉-조공관계를 맺었으나 형식적 행위였습니다. 고려는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고 평화를 유지하였습니다.
②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으나 고려는 황제국 체제를 갖추고 국가적 자존감을 지켰습니다. 고려가 중심이 되는 천하를 구성하고, 고려 국왕을 해동천자라고 하였습니다.
③ 고려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원적 천하관에 입각한 외왕내제 체제였습니다. 12세기 금과 사대 관계를 맺었지만 '외왕내제'상태는 유지하였습니다. 고려 후기 원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으면서 황제국 체제가 부정되었습니다.
12세기 국제질서의 변동 1. 여진
여진은 발해의 구성원이던 말갈의 후예로,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허나 11대 문종의 재위시절부터 여진의 위협이 격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동여진 완안부가 있었습니다. 15대 숙종은 정규군을 동원해 여진을 축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잇따른 패전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에 윤관은 기병 위주로 편성된 여진족을 상대하기 위해 강력한 기병을 양성코자 했고 기존 고려의 중앙군이라 할 수 있는 2군 6위의 경군이 부족한 군인전 등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별무반'이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게 됩니다.
별무반은 당시 정식 직임을 갖고 있는 문무 관원과 과거 응시자, 일부 승려 등을 제외하면 양인 신분의 남성들을 중심으로 편제한 군사 조직이었다. 이들 중 말을 가진 자는 기병인 신기군으로, 승려는 항마군으로 편성하고, 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보병인 신보군이나 기타 도탕⋅경궁⋅정노⋅발화군 등의 특수군으로 편성하였습니다. 보병 신보군의 대다수를 이루는 자들은 백정이라고 불리우는 일반 농민들이었습니다. 원래 백정은 군역을 지지 않는 농민층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고려 전기라면 이들은 전투에 동원되더라도 아주 예외적인 상호아에만 투입이 되었는데, 별무반의 등장은 2군 6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군사제도의 중대한 변화를 말해줍니다.
고려는 예종 2년인 1107년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성공하고 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아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나, 여진과의 계속되는 전쟁이 부담되어 동북 9성을 반환하고 강화를 성사하였습니다.
여진은 발해의 구성원이던 말갈의 후예로,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허나 11대 문종의 재위시절부터 여진의 위협이 격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동여진 완안부가 있었습니다. 15대 숙종은 정규군을 동원해 여진을 축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잇따른 패전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에 윤관은 기병 위주로 편성된 여진족을 상대하기 위해 강력한 기병을 양성코자 했고 기존 고려의 중앙군이라 할 수 있는 2군 6위의 경군이 부족한 군인전 등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별무반'이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게 됩니다.
별무반은 당시 정식 직임을 갖고 있는 문무 관원과 과거 응시자, 일부 승려 등을 제외하면 양인 신분의 남성들을 중심으로 편제한 군사 조직이었다. 이들 중 말을 가진 자는 기병인 신기군으로, 승려는 항마군으로 편성하고, 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보병인 신보군이나 기타 도탕⋅경궁⋅정노⋅발화군 등의 특수군으로 편성하였습니다. 보병 신보군의 대다수를 이루는 자들은 백정이라고 불리우는 일반 농민들이었습니다. 원래 백정은 군역을 지지 않는 농민층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고려 전기라면 이들은 전투에 동원되더라도 아주 예외적인 상호아에만 투입이 되었는데, 별무반의 등장은 2군 6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군사제도의 중대한 변화를 말해줍니다.
고려는 예종 2년인 1107년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성공하고 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아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나, 여진과의 계속되는 전쟁이 부담되어 동북 9성을 반환하고 강화를 성사하였습니다.
12세기 국제질서의 변동 2.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여진족은 사실 발해가 멸망한 이후로 한동안 만주지역을 떠돌며 거란족을 피해 지내야 했는데요, 거란의 요나라에 망조가 들자 세력을 키워 12세기 초 부족 통일을 매듭지어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합니다. 이후 1125년 금나라는 송나라(한족)와 연합하여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송나라가 잔머리를 굴려 배신하려 하자 송나라 마저 1116년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를 차지합니다. 고려에서는 금이 강성한 현실을 받아들여 금에 사대하기로 결정합니다.
여진족은 사실 발해가 멸망한 이후로 한동안 만주지역을 떠돌며 거란족을 피해 지내야 했는데요, 거란의 요나라에 망조가 들자 세력을 키워 12세기 초 부족 통일을 매듭지어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합니다. 이후 1125년 금나라는 송나라(한족)와 연합하여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송나라가 잔머리를 굴려 배신하려 하자 송나라 마저 1116년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를 차지합니다. 고려에서는 금이 강성한 현실을 받아들여 금에 사대하기로 결정합니다.
3) 무역과 문화교류
① 고려는 선진 문물은 받아들이되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은 전통을 지킨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려는 토풍을 중시했으며, 팔관회와 연등회는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② 대외 교역은 송과 가장 활발하여 서적과 비단, 약재, 차 등을 들여왔고, 고려 특산품인 금, 은, 인삼, 종이, 붓, 먹 등을 가져갔습니다. 교역로는 고려의 벽란도와 중국 산둥반도의 덩저우를 있는 길이 가장 짧았습니다.
③ 거란과의 무역은 사신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거란의 모직물, 말, 낙타, 무기가 들어왔고 고려에서는 먹, 종이, 인삼 등이 공물에 포함되었습니다. 거란에서 만든 대장경이 고려에 들어와 고려의 대장경 제작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④ 여진은 금 건국 이전에는 국경 근처에서 고려와 교역하였고, 금 건국 뒤에도 압록강변에 각장을 설치하고 교역하였습니다. 이 밖에 일본과 아라비아(대식국) 상인들도 고려에 왔습니다.
4-4. 고려 전기의 사상과 문화
1) 불교와 유교의 공존
① 고려는 불교 국가였습니다. 불교는 세소과되어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려는 정책적으로 불교를 지원하여 사찰에 여러 혜택을 주었습니다. 승과를 실시하고 승관제도를 운영했으며, 고승을 왕사·국사에 임명하여 고문 역할을 맡겼습니다.
② 불교계에서는 선종 불교가 교종과 양립하였습니다. 교리 면에서는 교·선 통합이 과제가 되었습니다. 의천은 해동천태종을 개창하여 교관겸수를 바탕으로 통합을 시도하였습니다.
③ 유교는 성종 때 고려의 정치이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유교는 점차 과거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여 학문적 발전은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④ 풍수지리 설이 유행하여 명당에 거주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수도의 입지를 중심으로 표현되었지만, 묫자리를 둘러싼 풍수지리설은 고려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 역사서 편찬과 역사 인식
① 고려 초의 실록은 거란 침략 때 불타, 칠대 실록을 편찬하였습니다. 그 뒤 왕대별로 실록을 만들었지만 남아있는 것은 없습니다.
② 고려 전기의 대표적 역사서는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입니다. 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가 있으나 전통문화를 소홀하게 다루고 지배층 중심 서술에 머무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이전에 구삼국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③ 고려 전기의 역사 인식은 신이사관과 유교사관으로 구분됩니다. 김관의가 편찬한 편년통록은 신이사관에 입각하였습니다.
구분 | 삼국사기(관찬) | 삼국유사(사찬) |
---|---|---|
제작시기 및 집필자 | 고려 인종 23년(1145년)에 김부식과 여러 학자들이 왕명을 받아 편찬 |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에 일연스님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추측. |
당시의 상황 및 사서의 성격 | 여진(금)의 압력과 묘청의 난으로 인한 혼란과 민심의 분열 > 유교적 관점, 사대주의적, 보수적 성격. |
무신정변과 몽고의 침공 및 압제 > 불교적 관점, 민족적, 자주적 성격. |
저술동기 | 민심의 수습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 강화 유교정치의 재확립 |
무신정변, 원 침입 이후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정신적 기준을 찾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과거의 전통을 재인식 |
역사 인식 | 1. 이상적인 유교정치의 구현: 역사를 교훈이나 후세의 귀감으로 파악하여 역사서술을 현실 비판의 도구로 삼음 2. 멸사봉공의 의무와 도리를 강조한 국가의식을 강조 |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 ※ 불교적·신화적 세계 |
서술방법 | 기전체: 본기·지·연표·열전으로 구성 ※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황제의 업적), 세가(제후의 전기), 표(연표), 열전(각 분야의 저명한 개인의 전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본기와 열전만 있으면 기전체의 기본 요건을 갖춘다. 기전체는 인물 중심의 종합적 역사 서술방식. |
저자 개인이 관심을 가지는 부분에 대해 자유로이 서술(기사본말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음) ※기사본말체: 사건의 명칭을 제목으로 내걸고 그 사건과 관련된 기사를 모두 모아 그 사건의 발단과 결말을 기술하는 방법. ※편년체: 사실을 연, 월, 일 순서로 기록하는 서술 방식.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절요,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이 편년체 역사사서. (~절요, ~통감, ~실록은 모두 편년체) |
역사적 의의 | 역사학적 방법과 역사관에 있어서 고대 사학으로부터 새로운 발전 1. 기록을 그대로 전재하고 설화와 신화를 그대로 기록하던 고대의 역사학으로부터 벗어나 철저한 문헌기록에 의존 2. 기록된 사료의 사실 여부를 검토·비판하여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견지에서 역사사건을 비판 3. 우리 나라만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논하지 않고 당시 세계적인 보편성을 띤 유교라는 관점에서 한국 중세사학의 기초를 정립 |
1. 사료적 가치의 중요성 - 전거를 명확히 밝힘 2.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 3. 역사적 신이에 대한 기록은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보려는 노력 4. 민족 자주성과 문화의 우위성 강조 5. 불교사관을 통한 불교사 영역의 확대 |
특징 | 우리나라 현존하는 최고의 사서. | 일연 혼자서 신화, 설화 등 관심 가졌던 사건들을 수집하여 자유롭게 기록. |
3) 귀족 문화와 불교 미술
① 고려 전기에는 귀족문화와 불교미술이 발달하였습니다. 귀족문화로서 도자기와 나전칠기, 입사 수법을 사용한 금속 공예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도자기는 고려 초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12세기 중엽부터 상감청자로 발전하였습니다.
② 불교미술로는 석불과 석탑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등의 거대한 석불은 지방 세력의 순수한 미의식을 보여줍니다. 불탑은 다각, 다층탑 등 다양한 석탑이 만들어졌으며, 개성 현화사 7층석탑, 김제 금산사 6각 다층탑, 평창 월정사 8각 9층탑이 있습니다. 고려를 대표하는 불탑은 부도였으며, 팔각원당형 부도는 신라 말~고려만의 독특한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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