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이해] 제 7장 조선 전기의 변화와 외세의 침략 + 제 8장 조선 후기 정치 변동과 경제 발전


    [한국사의 이해] 제 7장 조선 전기의 변화와 외세의 침략 + 제 8장 조선 후기 정치 변동과 경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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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교과서엔 없으나, 초기 조선 왕들의 업적 등은 정리해야 할 거 같아서요.


    (1) 1대 태조(재위 1392~1398년) - 조선의 건국

    ① 고려 말의 혼란
    ㈎ 무신정권, 몽고의 침입, 뒤이은 원의 내정간섭으로 고려의 통치체제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특히 토지제도의 붕괴는 대다수의 농민을 생존의 극한으로 몰아 넣습니다.
    ㈏ 대외적으로는 원, 명의 교체,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와 신진사대부의 갈등 속에서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끝나면서 새로운 왕조 건설을 추구하는 급진세력이 등장합니다. 

    ② 이성계의 등장
    ㈎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북쪽 국경 지대의 토호 세력으로서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이 이에 적극 협력하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합니다. 
    ㈏ 이성계는 반란 집압, 원의 잔당과 왜구 및 홍건적 격퇴 등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 신진 사대부와 연계하고, 위화도 회군(1388년) 후 정권을 장악하여 개혁 추진
    공양왕 3년에 과전법 실시: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점탈한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사대부 등에게 분배(농민에게 토지 재분배 실시 않음)
    ㉡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삼음

    ③ 조선의 건국
    ㈎ 역성혁명에 반대하는 정몽주 등을 제거한 후 1392년 공양왕에게서 양위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등극
    ㈏ 1393년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천도
    ㈐ 건국 이념
    ㉠ 사대 교린: 친명 정책
    ㉡ 억불 숭유: 유교가 정치, 사회, 문화의 지도 이념
    ㉢ 농본 민생

    (2) 3대 태종(재위 1418~1422년) -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 정비



    왕자의 난
    1. 태조는 정비 신의왕후(1391년 사망)에게서 1남 방우(일찍 사망), 2남 방과(2대 정종), 3남 방의(왕위 계승 싸움에서 중립을 지킴, 야망 없었음), 4남 방간, 5남 방원(3대 태종) 형제 등을, 계비인 신덕왕후에게서 7남 방번(혼인 관계로 인해 세자가 될 수 없었음), 8남 방석을 얻었는데 아직 10살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 신권 중심의 정치를 펴려는 정도전의 의도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는 신덕왕후의 정치적 결합

    2. 5남 방원은 조선 건국의 1등 공신이나 그 야심 때문에 많은 견제를 받았으며 특히 신권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는 정도전과 대립합니다. 

    3. 1차 왕자의 난: 5남 방원은 정도전, 남은 등 공신 세력과 세자 방석을 제거한 후 형인 2남 방과를 2대 정종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세제가 됩니다. 
    4. 2차 왕자의 난: 4남 방간이 5남 방원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실패
    5. 이후 방원은 정종에게서 양위 받아 왕위에 오릅니다. 


    ① 6조 직계제
    ㈎ 속아문제: 거의 모든 관청(아문)을 6조에 예속시켜 6조가 모든 업무 장악
    ㈏ 6조 직계제: 6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하고 그 명을 받아 시행
    ㈐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 6조 직계제 하에서 의정부는 실권 없음

    * 태종 때 6조 직계제 → 세종 때 의정부 서사제 → 세조 때 6조 직계제 → 이후 의정부 서사제

    ② 사병 혁파
    ㈎ 고려 말 통치체제 문란으로 지방관, 권문세족 등이 관군을 사병처럼 부림: 통치체제가 무너지면서 군역제도도 붕괴되어 권세가들이 군사를 징집하여 급료 등을 지급하고 대신 충성을 받음(이들은 관군이나 실제 사병의 역할)
    ㈏ 조선 초에도 왕자와 공신들이 관군을 사병처럼 부려 왕자의 난 등이 가능하였는데, 태조는 이를 금지시키고 군권을 삼군부로 통합: 이를 ‘사병 혁파’라 합니다.

    ③ 기타
    ㈎ 공신과 외척 세력 제거 → 세종 때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유교정치 구현이 가능
    ㈏ 억불정책: 사원의 토지와 노비 수 제한
    ㈐ 재정 확충 위해 양전사업과 호패제도 실시
    ㈑ 사간원을 독립기관으로 만들어 관료 감찰
    ㈒ 신문고 설치


    (3) 4대 세종(재위 1418~1450년) - 유교 정치의 실현

    ① 의정부 서사제 부활
    ㈎ 이유: 
    ㉠ 6조 직계제 하에서는 왕이 모든 주요 업무를 직접 관장하여야 하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 왕권이 강화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이룬 상태
    ㈏ 세종은 6조에서 올라오는 사항들을 의정부에서 검토한 후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재가를 얻어 다시 6조로 내려 보내 시행토록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시행함
    ㈐ 경륜이 풍부한 원로 대신들과 함께 국정을 처리한다는 의미로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는 반면 왕권이 약화되는 측면도 존재합니다. 

    ② 집현전 설치
    ㈎ 기능: 경연(왕, 세자에 대한 교육과 자문), 학술연구와 서적 편찬, 정책 연구
    ㈏ 세조 때 폐지 → 성종 때 홍문관으로 부활

    ③ 억불 정책
    ㈎ 불교의 여러 종파를 선종과 교종 양종으로 정리하여 사찰 36곳만 인정하고(교종 18곳, 선종 18곳) 각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제한: 그 외 사찰의 토지는 모두 몰수하고 사원 소속의 노비를 해방
    ㈏ 그러나 세종 자신은 불교 신자로서 반대를 무릅쓰고 모친인 원경왕후를 추모하여 궁궐 내 불당을 지었으며 한글로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등 불교서적 간행

    ④ 영토 확장
    ㈎ 여진을 정벌하고 압록강 상류에 4군, 두만강 하류에 6진 개척(이 것이 오늘날의 국경선)
    ㈏ 새로이 개척된 지역에 남쪽의 주민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하는 사민정책 실시
    ㈐ 1419년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 정벌

    ⑤ 징세제도 개편
    ㈎ 공법상정소를 설치하여 공법(조세에 관한 법)을 제정합니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 전국의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눈 후(전분 6등법) 다시 그 해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연분 9등법) 세액 책정하는 방식입니다. 

    ⑥ 유교적인 윤리규범을 국가, 사회 전체로 확산시켜 자리잡게 함
    ㈎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여 보급
    ㈏ 국가행사를 유교식으로 거행 → 성종 때 『국조오례의』 편찬
    ㈐ 주자가례 시행

    ⑦ 농사직설 편찬(정초)
    ㈎ 고려 말 원에서 들여 온 『농상집요』 등 기존의 농서는 중국 화북 지역의 밭농사와 휴한농법에 맞는 농서로서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연작상경, 수전농법이 확대되면서 우리 현실에 안 맞게 됨
    ㈏ 세종 때 전국의 경험 많은 농부들의 자문을 구하여 편찬: 이들의 경험을 전국에 보급시키고자 편찬
    ㈐ 우리 실정에 맞는 씨앗 저장법, 토질 개량법, 모내기법 등의 농법 정리


    (4) 7대 세조(재위 1455~1468년) - 왕권강화와 측근 중심의 정치

    ① 단종: 왕권의 약화
    ㈎ 4대 세종의 뒤를 이은 5대 문종(재위 1450~1452년)이 일찍 승하하고 6대 단종(재위 1455~1457년)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종의 유명을 받은 고명 대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이 보필: 황표정사
    ㈏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출신들은 김종서 등의 전횡을 비판하며 수양대군과 연계

    ② 계유정난과 세조의 등극
    ㈎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권람, 한명회 등의 도움을 받아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 장악
    ㈏ 이징옥의 난: 김종서의 심복인 이징옥이 여진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후금이라 칭하였으나 진압 당함
    ㈐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 하자 사육신의 난 등 단종 복위 운동이 계속 일어남 → 결국 세조는 왕권의 안정을 위해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이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낸 후 사사시킵니다. 

    ③ 왕권 강화
    ㈎ 6조 직계제 부활
    ㈏ 집현전과 경연을 폐지: 세조의 지나친 왕권 강화 정책이 집현전 출신들의 반발을 초래하고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이어지자 이를 빌미로 폐지
    직전법 실시: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수조권)를 지급하였는데 조선 초부터 과전을 축소하려는 노력의 결실
    ㈑ 군사제도로 진관체제 시행
    ㈒ 경국대전 편찬 작업을 시작 → 성종 때 완성

    ④ 측근 중심의 정치
    ㈎ 왕위 찬탈로 많은 반발을 초래한 세조로서는 믿을 수 있는 측근들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
    ㈏ 그 결과 이들이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되면서 세조 이후에도 정권을 장악하여 훈구세력이 형성

    (4) 9대 성종(재위 1469~1495년) - 문물제도의 정비

    9대 성종은 7대 세조의 손자로,(세조의 급사한 장남의 둘째 아들) 8대 예종이 이른 나이에 승하하였고 예종의 아들이 4살이었던 것과 권신이어썬 한명회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 등으로 새 국왕으로 지명됩니다.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13세로 어렸던 탓에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할머니인 정의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① 훈신 견제 위해 사림 중용
    ㈎ 세조 사후 즉위한 세조의 차남 8대 예종(재위 1468~1469년)이 재위 1년 만에 승하하고 성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한명회, 신숙주 등의 훈신들이 실권 장악
    ㈏ 성종은 성년이 되어 친정을 하면서 훈신들을 견제하고자 지방의 사림을 불러 들였는데, 그들이 바로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 입니다. 

    ② 경국대전 반포
    ㈎ 세조 때 착수하여 성종 때 완성했으며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 체계로 편찬
    『경국대전』 편찬으로 통치규범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고려 이래의 기존의 법체계를 수용하고 이를 성문화하여 중국 법규의 무분별한 수용을 방지

    조선의 법전
    1. 태조 때 정도전이 『조선경국전』, 조준 등이 『경제6전』을 편찬했으며 이후 새로 시행되거나 변경된 내용들을 모아 『속육전』 편찬
    2. 세조~성종 때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체계를 세울 필요에 의해 『경국대전』을 편찬했으며 이로써 양반관료체제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정비됨
    3. 이후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영조 때 『속대전』 편찬: 조선 후기 변화된 사회에 맞추어 전면 개편
    4. 정조 때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종합한 『대전통편』을 편찬
    5. 고종 때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 편찬

    ③ 억불정책
    ㈎ 세조는 불교신자로서 때 불경 간행 위해 간경도감 설치 → 성종 때 폐지
    ㈏ 도첩제 폐지: 조선 초 승려가 되려면 국가에 포를 납부해야 하는 도첩제를 실시했는데 도첩제가 폐지됨으로써 (합법적으로) 승려가 되는 길 자체가 막힘

    ④ 학문 진흥
    ㈎ 홍문관: 도서관이었던 홍문관에 집현전 기능을 부여하여 학문 연구기관으로 삼음
    ㈏ 경연의 부활
    ㉠ 경연은 왕, 세자에게 유교 경전, 역사 등을 교육하는 제도로서 왕을 비롯하여 조정 대신들도 참석하며 강의가 끝나면 왕과 신하들이 함께 국정을 논하기도 함
    ㉡ 세조 때 폐지 → 성종 때 부활
    ㈐ 서적 편찬: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악학궤범, 국조오례의 등

    ⑤ 관수관급제 실시
    ㈎ 세조 때 현직의 관리에게만 토지(수조권)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하자 관리들이 퇴직 후의 생계를 염려하여 농민에 대한 수탈이 증가
    ㈏ 성종 때 국가가 직접 농민으로부터 조를 거두어 관리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 시행
    ㈐ 관수관급제 실시로 전주-전객의 관계에서의 수조권적 지배(경제외적 지배)가 종식되고 이후 토지의 소유권을 중시하게 되어 지주-전호제 확산

    직전법과 관수관급제의 관계
    1. 과전법 → 직전법 → 관수관급제로 변화했다는 설명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틀림
    2. 직전법은 현직의 관리에게만 토지(수조권)를 지급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토지제도에 관한 법이고 관수관급제는 직전법의 체제하에서 관리가 직접 조를 징수하는 방식을 바꿔 국가가 대신하여 조를 거두어 관리에게 지급하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급료 지급 방법

    7-1. 조선 전기의 변화와 사화


    1) 조선 초기의 변화

    조선왕조의 현실 정치에서는 조선 초기에 국왕을 뒷받침해 주는 세력으로 공신의 역할이 컸습니다. 공신은 왕자의 난 등 여러 정치적 사건 때문에 많이 배출되었고, 강력한 국왕을 뒷받침하여 현실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이들이 흔히 '훈구(勳舊)'라고 불렸던 세력입니다. 
    광의로는 조선 건국의 공신 및 그 후손들까지 포함하는 조선 전기의 집권 계층을 말하나, 보통  사림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던 세력으로써의 세조 때부터 정권을 장악하였던 공신 및 그 후손들의 집권 세력을 말합니다.
    중종반정 때의 '반정공신'은 무려 117명에 이르렀는데, 자자손손 대물림한 이들의 특권은 왕조를 좀먹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림 세력이 등장합니다. 

    ① 사림의 등장
    ㈎ 고려 말 신진 사대부 계층 중 온건 개혁파의 후예들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향촌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
    ㈏ 길재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지는 이들은 유교 경전에 음과 주석을 달고 연구하는 ‘경학’과 도덕, 윤리 등을 연구하는 ‘도학’을 중시하였으며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하며 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
    ㈐ 향촌의 중소 지주이자 지배층으로서 향촌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보급하기 위해 사창제, 유향소, 향사례, 향음주례 등을 실시
    ㈑ 성종 때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사림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훈구파와 대립

    ② 훈구파와의 갈등
    ㈎ 훈구파는 정권을 장악하면서 경재소, 유향소 등을 통해 향촌사회도 장악하고 대토지 집적 → 중소 지주층인 사림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
    ㈏ 반면 사림은 자신들의 세력 기반인 향촌에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시킴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아울러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유지시키고자 함
    ㈐ 이후 사림은 주로 3사의 언관직으로 진출하여 훈구파의 전횡과 부패를 공격하면서 대립

    ③ 사림의 정권 장악
    ㈎ 네 차례에 걸친 사화 등을 통해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향촌 사회에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어 꾸준히 명맥 유지: 중소 지주로서의 지위 외에도 서원이나 향약 등을 통해 향촌사회를 주도
    ㈏ 명종 이후 훈구 세력이 소멸되면서 훈구와 사림의 대립 구도가 소멸: 훈구와 사림의 구별 자체가 무의미해졌고, 선조 즉위 후 사림을 대거 등용하면서 사림이 정권을 장악
    ㈐ 이후 명종 때의 척신정치에 대한 처리 등을 놓고서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면서 붕당정치가 시작

    2) 사화


    ① 무오사화(1498년)
    ㈎ 9대 성종 때부터 진출한 사림은 3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전제왕권을 추구하는 10대 연산군(재위 1495~1506년)과 보수적이고 부패한 훈구파를 비판하면서 이들과 갈등 관계
    ㈏ 연산군 4년에 성종 실록을 편찬하던 중 춘추관 사관이었던 사림의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실록을 만들기 위한 기초 자료)에 포함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사림 세력이 숙청당하는 무오사화가 발생: 실록을 만들기 위한 사초(史草)가 문제되어 일어났다 하여 ‘史禍’라고도 함

    ② 갑자사화(1504년)
    ㈎ 연산군 10년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의 신원을 회복하고자 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숙청하면서 갑자사화가 시작
    ㈏ 그러나 사실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이미 모친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갑자사화는 모친의 복수를 빌미로 왕권강화에 장애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고 친정체제를 강화하려는 시도로,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경연을 폐지하고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는 등 전제왕권을 강화합니다
    ㈐ 갑자사화로 훈구파와 사림 모두 피해를 보았으나 훈구파는 중종 반정을 주도하면서 재기하고 사림은 중종에 의해 등용되면서 재기하여 중종 때 다시 충돌

    지나친 복수는 사람들에게 염증을 불러일으켜 반정이 일어났습니다. 반정(反正)이란 바른 것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국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국왕을 임금으로 세운 것인데,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은 뒷날 중종반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서 성희안, 박원종 등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광조는 중종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 뒤에 등용되어 개혁정치를 제시하였습니다.

    ③ 기묘사화(1519년)
    ㈎ 훈구파는 연산군을 몰아 내고 11대 중종(재위 1506~1544년)을 즉위시키면서 정권 장악
    ㈏ 중종은 조광조 등 사림을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시도
    ㈐ 조광조의 개혁 정치
    ㉠ 현랑과 실시
    당시 과거제는 권문세가의 자제들에게 유리하게 이루어졌으며 또 사장 중심으로 치러져 경학을 중시하는 사림들이 거부감을 가졌는데,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이를 추천하여 관직에 등용하는 현량과가 실시되면서 사림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
    ㉡ 유교주의적인 도덕정치 구현
    성리학적인 이념에 충실하여 불교와 도교 등 여타의 사상을 배척: 소격서 폐지 등 불교와 도교 행사 폐지하였고 향약, 주자가례, 소학 등의 보급을 통해 유교적인 실천윤리 보급하였으며 경연과 언론 활동을 강화하여 왕도정치, 도학정치 추구하였습니다.
    ㉢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함: 방납 등을 통해 치부하고 있는 훈구세력 비판
    ㉣ 위훈삭제: 조광조 등은 공신 세력을 꺽고자 중종 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의 공이 과장되었다 하여 시정 조치를 취하여 공신들이 강력하게 반발
    ㈑ 중종으로서는 사림을 통해 공신 세력을 어느 정도 꺾음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반면 조광조의 개혁에 거부감: 조광조 등이 주장한 도학정치는 결국 재상 중심의 정치, 왕권 약화를 의미하여 중종이 반감
    ㈒ 결국 조광조 등 사림의 급진적인 개혁과 자신들만이 옳다는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이 훈구파의 편을 들어 사림을 숙청
    ㈓ 기묘사화 이후에도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다시 등용

    ④ 을사사화(1545년)
    ㈎ 중종 말년 중종의 뒤를 이어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전개됩니다. 
    ㉠ 대윤: 중종의 두번째 부인인 장경왕후의 외척으로서 그 소생인 세자(후일 인종으로 즉위)를 지지하는 세력. 
    ㉡ 소윤: 중종의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의 외척으로서 그 소생인 경원대군(후일 명종으로 즉위)을 지지하는 세력.

    ㈏ 중종 사후 장경왕후(장경왕후는 산후병으로 인종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의 소생인 세자가 12대 국왕 인종(재위 1544~1545년)으로 즉위하였으나 8개월 만에 승하하자(암살설이 있습니다.) 문정왕후의 소생이 13대 명종(재위 1545~1567년)이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면서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고 소윤이 정권을 장악합니다. 
    ㈐ 윤원형 등 소윤은 이후 장경왕후의 외척인 대윤과 인종의 즉위를 지지하였던 이들을 숙청하는데 이것이 을사사화
    ㈑ 을사사화는 외척들간의 싸움으로서 그 여파로 훈구와 사림 모두 피해를 봄: 당시 훈구 만이 아니라 사림도 대윤과 소윤으로 각각 나뉘어짐 (다만 사림은 적장자에 의한 계승을 지지하여 주로 대윤에 속함)
    ㈒ 을사사화 이후 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대윤 일파를 비롯한 사림들은 서서히 복귀하였습니다. 사림들은 선조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정계를 장악하면서 훈구와의 갈등을 마감하고 사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3) 사림 등장의 의의

    우선 사림은 훈구에 비해 새로운 가치와 사회를 지향하였습니다. 훈구는 현실 권력을 독점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불법적인 권력을 동원하여 정치·경제적 비리를 저지르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사림은 대체로 지방 사회에서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사림들이 정치적으로 진출하면서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한 공론정치의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삼사(三司)라는 기관은 지위가 낮은 기관이기는 하나 고위 관료뿐만 아니라 국왕까지도 비판할 수 있었고, 언론기관을 장악한 사림은 공론(公論)을 모아서 자신들의 주장을 폈기 때문에 권력의 분할과 균형이라는 결과도 가져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삼사-이조전랑을 연계하여 권력에 비판적인 하나의 축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대신 또는 국왕과 함께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국왕과 신하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함께 다스린니다는 공치(共治)가 운위될 정도로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선전기의 국왕 중심, 공신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사림 중심의 정치로서 사림정치의 본격화를 의미하였습니다. 사림정치의 하나였던 붕당정치, 나아가 사림정치가 등장한 것입니다.

    7-2. 향촌사회의 변화


    1) 도시와 농촌의 변화

    조선 전기 도시의 성장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한양을 제외하고는 개성과 평양 정도가 상업이 발달하여 한양처럼 시전을 두었을 뿐, 여타 도시의 성장은 아직 미흡합니다. 
    조선 초기 군현제가 확립된 이후 각 군현의 내부는 면리제로 편제되어 수령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향촌사회에는 고려 말부터 성장했던 중소지주 출신의 사족이 있었습니다. 지방 세력 가운데 향리들은 주로 읍치에 거주한 반면 사족들은 고을의 여러 곳에 흩어져 거주하며 토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렇게 점차 새로운 촌락이 형성되었습니다.

    현존하는 한국의 촌락은 대체로 15~18세기에 성립되었는데, 15~16세기에 형성된 것이 거의 절반에 이르렀습니다. 조선 초부터 산을 등지고 형성되었던 촌락이 평야를 배경으로 하는 촌락으로 발전되는 형태를 띠었고, 촌락 내에 사는 지배층의 구성도 점차 변화하였습니다.

    15세기까지 조선의 풍습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가서 생활하는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모계 혈연도 부계 혈연과 같은 비중으로 중시되었으며 양반들 사이에서 재산을 상속할 때 남녀의 균분 상속이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풍습 아래서는 조선 후기와 같이 일가친척이 함께 살며, 부계 위주의 족보를 만들고, 동족 집단을 이루어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형태에서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중소지주적 성격이 강해진 사족들은 점차 양반 계층 내에서 남자를 우대하고, 그 중에서도 장자를 우대하는 상속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또 결혼 이후의 거주 형태도 처계 위주에서 부계 위주의 거주로 변해 갔습니다. 부계 혈연관계가 중시되면서 부계 위주의 동족 결합이 이전보다 강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부계를 중심으로 한 족보와 동족마을의 출현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새롭게 발견한 성리학에 입각한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친족 내부의 일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습니다. 15세기에는 양인 위주의 일원적 질서, 즉 제일적 지배체제를 지향하여 지방에서도 국가가 지방을 직접 지배하려는 관 주도 성격이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지방에서 양반 사족들이 성장하면서 이들은 성리학에 입각한 새로운 지방지배질서를 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국가 역시 군현 이하의 면리에서 지배력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현실을 인정하고 재지 사족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습니다. 곧 재지 사족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이들을 매개로 하는 간접적 지배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이는 중앙집권적 지배질서와 지방분권적 자치 질서가 상호 공존하는 형태의 타협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성리학 실천의 현장, 향회와 향악

    향촌사회에서 사족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체모를 유지하는 동시에 지역사회의 주도적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무엇을 들 수 있을까dy? 서원이라는 사립학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교육기관이 지닌 한계는 명백하였습니다. 따라서 향촌사회 내에서 사족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한 조직으로는 향회와 향안, 향약(鄕約), 유향소 등이 있었습니다.

    향회는 향안에 등록된 사족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여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여할 수있는 사람은 향안에 등록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향안에 올라 있어야 양반 사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향안은 부나 군 또는 현 단위로 작성되었는데, 이에 들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처의 세 가문의 각각 3대조 조상까지 심사하여 적절한지 여부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한쪽 가문이라도 한미하면 향안의 입록 후보자가 비록 고관이더라도 쉽게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향촌사회를 이끌어 가는 집단이 확고하게 성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비록 과거에 합격하여 양반이 되더라도 향촌사회에서는 또 다른 사족으로서 인증이 필요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향촌사회가 운영되었던 사정을 말합니다. 실제로 향회에 모인 이들은 친목 모임만 가진 것이 아니라 향촌 지배의 중요한 기구였던 유향소의 임원을 선출하였습니다. 유향소는 부·목·군·현에서 수령의 지방 통치를 보좌하며, 향리를 감독하거나 지방의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담당했던 기구입니다.

    유향소는 수령의 관아가 공식적인 기구인데 비해서 비공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관아 다음의 위상이 있었기에 이관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지배층이었던 이족들이 조선 초에 양반과 향리로 분화되었다가 16세기에는 양반 사족 중심의 지배체제에 부속된 것입니다.

    이러한 유향소조차 15세기에는 관권 위주의 일원적 질서 속에서 혁파당하였습니다. 이에 김종직을 비롯한 성종대의 사림들에 의해 향촌질서의 안정책으로 유향소 복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의 목표는 성리학적인 향촌 교화의 방법 가운데 하나인 향사례·향음주례의 실천을 통해 향촌자치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서울에 있던 경재소와 연결되어 훈신과 척신 계열에 장악됨으로써 실패하였습니다.

    7-3. 동아시아 정세와 왜란과 호란


    1) 16세기 동아시아 정세

    조선과 명, 일본, 여진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명의 건국 이후 '중국 중심의세계질서'인 책봉-조공관계를 통해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이 덕분에 조선은 건국 이후 2백 년 동안 외부의 명시적인 위협에 시달리지 않고 장기간 안정적인 상태에서 국력을 내부의 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이 취한 외교관계 전략인 사대와 교린의정책은 조선의 북서방과 해안에 위치한 두 위협 세력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명과는 사대정책을 통해 정치 · 외교·경제·문화적인 방면에서 협조하면서 북방 기마민족인 여진의 위협에 공동 대처했고, 일본에 대해서도 군사정책과 교린정책을 번갈아 사용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쟁인 임진왜란의 발발은 이러한 안정적인 국제관계를 일시에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우선 요동이 11세기 이래 동아시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다가 명나라의 건국 이후 점차 그 위상이 약화되어 힘의 공백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10세기 이전까지 중국 역사의 중심은 관중을 중심으로 한 장성 이남의 사회였습니다. 그러다가 거란의 요나라가 등장하면서 요동 중심의 북방 세력이 새로운 세계질서의 한 축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거란은 요동을 통일한 후에 중국에 침입하여 연운 16주 등 중국을 중심으로 통합 국가를 건립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여진과 몽골, 금과 원, 청나라로 지속되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명의 건국은 오히려 예외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명은 이전에 세워졌던 요, 금, 원이나 이후 세워진 청과는 달리 한족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또 요, 금, 원, 청나라가 요동에서 일어나 요동을 통일한 후에 중국으로 진출하여 일부나 전부를 지배한 것과는 달리, 명의 중심은 중국이었으며 이후 요동을 침공하여 통합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요동의 역사적 위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종래 중국 역사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전락했고, 여기에 사는 이적들은 기미의 대상이 될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변 존재로 전락한 요동에서는 자연스럽게 힘의 공백 상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 말 요동을 공략하려고 시도하거나 조선에서도 요동 정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배경도 이러한 상황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문제는 명나라의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도 명의 요동 장악이 크게 약화된 명대 후기에는 이 지역의 안정성이 떨어지며 힘의 공백이 더 크게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일본의 해양 진출과 서세동점입니다. 명나라 대외정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해금 정책입니다. 명은 빈번하게 왜구가 동남 해안을 침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연해의 주민들이 사사로이 해외의 여러 나라들과 함께 교통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습니다. 대신 연해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겨 살게 하는 사민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민정책은 결과적으로 연해를 공백지대로 만들어서 왜구에게 더욱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습니다. 그 결과, 왜구의 활동 범위는 산동 지역 뿐만 아니라 발해와 남중국해의 연안까지 넓혀졌습니다. 나아가 일본은 유구와 대만까지 공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명이 중심이 된 책봉-조공체제의 문제가 극단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책봉-조공체제의 중심에서 이를 관리하며 세계질서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책임이 있는 명나라의 힘이 약화되면서 더 이상 책봉-조공체제 유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책봉 조공관계를 통한 국제질서의 안정은 형식을 빌려서 주변 국가들에게 자발적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참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변국은 독립국가로서 내치와 외교는 자주적으로 하도록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조공을 통한 책봉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사로써 책봉을 유인하고, 회사로써 조공에 응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든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명분을 실현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실리의 희생이 필요하였습니다.

    주변국들은 실리를 챙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책봉-조공체제에 들어오려고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이었습니다. 명에서는 오히려 조선에게 사신을 줄일 것을 요구했음에도 조선은 1년 4공까지 늘리고, 비정기적인 사행도 구실을 붙여 수시로 파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책봉-조공관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될 때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군사적 · 경제적 능력이 미치지 못했을 때, 이러한 국제질서는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 조선 침략을 위한 구실에 불과하지만은 않았습니다.

    2) 임진왜란의 경과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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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병자호란의 경과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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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붕당정치의 전개와 탕평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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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효종·현종대 붕당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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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숙종대 환국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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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영조·정조대 탕평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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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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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농업기술의 발달과 지주제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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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상업의 발달과 국제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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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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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부세체제의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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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정법과 비총제의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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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동법의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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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균역법의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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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진휼책의 변화와 환곡의 부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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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대외관계의 변화와 실학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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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청관계와 청문화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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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일관계 개선과 통신사 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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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실학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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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4 소제목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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